[30호]찬양은 보고, 듣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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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돌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여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 때에 그 스랍 중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6:1-8)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학이 정통이라 주장하여 여러 교단으로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예배와 찬양은 신학의 이념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역사가 표현되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이 표현된다면, 우리의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그 예배와 찬양은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예배를 ‘본다, 드린다, 한다.’ 라는 차이 가운데 예배 개념이 발전되어 왔습니다. 예배와 찬양은 보는 것도 필요하고, 드리는 것도, 행하는 것도 중요한 전 인격적인 응답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은 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쓰인 ‘보인 것’은 육체적 눈으로 보는 것, 보는 것을 통해 이성적으로 아는 것, 보는 것이 바탕이 된 경험과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기자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 34:8-9 라고 했는데, 이것은 단지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찬양 가운데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찬양하는 찬양대가 노래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찬양 가운데 계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현대인의 속성은 ‘앉아서 보는 것’sit and see입니다. 그냥 앉아서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학교에서 강의할 때 집중하지 않는 학생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그들은 책 속에 숨어 있는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수와 칠판을 바라봅니다. 이처럼 찬양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찬양하는 사람만 보일 뿐입니다.
이사야는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 6:1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사야가 바라본, 어제도 오늘도 동일하신 하나님을 찬양 가운데 바라봐야 합니다.
루이스는 찬양의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행했는지 증명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인식하고, 그분이 행하신 행적을 찬양 가운데 발견해야 합니다.
저에겐 이런 예배 경험이 있습니다. 언젠가 부활 주일 아침 예배의 묵도송으로 찬송가 <무덤에 머물러>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감격! 이른 아침 승천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를 노래할 때는 내가 십자가의 증인이 된 마음입니다. 우리들은 찬양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을 바라봐야 합니다.

찬양은 듣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듣고 노래한다는 것은 쌍방통행을 의미합니다. 듣기만 한다든지, 듣지 않고 말만 하는 것은 일방통행입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제 말만 하더니, 사춘기를 보내며 ‘대화불가’를 선언하고 듣기만 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찬양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의의는 오직 믿음, 오직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재발견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라고 외치는 스랍들의 찬양을 들었습니다. 스랍들의 찬양을 듣자마자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찬양 가운데 하나님과의 이와 같은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들 마음속에 새겨져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인 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우리는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분은 자기를 낮추시고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불완전한 우리는 완전한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흠이 없으시며 우리는 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지만, 우리는 강건해도 팔십이라는 유한한 존재인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찬양을 통해 듣고 노래해야 합니다. 찬양대는 입을 통해 심령으로 노래하지만, 회중은 귀로 들음으로써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은 사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사명은 잃어버린 백성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 위에 놓인 것처럼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면 이스라엘에 구원이 임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저주가 임하는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사명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은 물론이고, 잃어버린 백성을 향해 찬양으로 선포해야 하는 선지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지만,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이지만, 사람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찬양의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당신은 찬양대원일 뿐만 아니라 찬양을 인도하고, 회중을 격려하고, 선포하고, 그들의 영과 마음으로 찬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도 찬송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찬양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렇게 부르실 때 이사야처럼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는 헌신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최선의 찬양을 위하여…………………………………………………
1. 찬양은 무엇입니까?
2. 루이스가 말하는 찬양에 필요한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3. 찬양할 때 입과 귀의 역할을 생각해 봅시다.

 

                                김남수
김남수 교수
 김남수 교수는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회음악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으며, 현재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와 신탄진침례교회 음악목사(역임), 한국찬송가공회 이사로서 섬기고 있다. 제45회 신인음악회(조선일보)로 데뷔하여, 21회 동아콩쿠르 입상, 18회 난파음악제 우수상, 18-19회 서울음악제에 연속으로 당선했으며, 대전광역시로부터 위촉을 받아 국악 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大田詩曲”(2001)을 발표했고, 합창곡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2002)을 출간했으며, Southern Seminary로부터 Distinguished Composition Award (2003)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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