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호]여행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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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장 29~37절

예수님께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율법교사인 그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가 이 질문을 한 이유는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 빗대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과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모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를 향하는 여정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시온 산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약 3,000ft(860~912m)에 위치했고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약 1,000ft(304~320m) 아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과 여리고의 높낮이의 차이는 거의 약 1,200m 이상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전역을 다스렸던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골짜기를 ‘붉은 피가 흐르는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햇빛에 비친 골짜기의 바위와 땅이 붉은빛을 띠기도 했고, 실제로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여리고라는 도시는, 엘리사가 그곳에서 사역하면서 선지자 양성학교를 만들었고 이로 인해 그 도시에 제사장과 레위인의 집성촌이 형성되면서 생겨났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오가며 맡은 업무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청빈과 경건의 삶을 살기보다는 성전에 드려진 예물 가운데 많은 것을 착복하여 자신의 거처가 있는 여리고로 가져갈 때가 많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강도들이 그 골짜기로 모여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피해갔을까요? 성결 규정이 있는 레위기 21장 1-11절을 보면, 제사장들은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이 규정을 범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원어 성경으로 읽어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문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30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31절에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라고 ‘내려가다가’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이 ‘내려가다가’라는 헬라어 단어는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서둘러 길을 떠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급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2절 역시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는 ‘내려가다가’를 받는 말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도, 제사장도 레위인도 서둘러 그 길을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겐 어떤 의도와 목적이 있었을까요? 이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왜 거의 죽을 때 까지 맞았을까요? 아마 자기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저항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도 역시 그 사람을 죽을 때까지 때렸던 이유는 그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도를 만난 사람이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무엇인가 손에 많이 들고 가던 중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 그들의 발걸음이 빨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사마리아라는 도시는 이스라엘의 분열 이후 오므리 왕조에 의해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해진 곳이었고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 범죄 한 도시였습니다. 오므리 왕조가 몰락하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앗수르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되었고, 사마리아에 살았던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에 노예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후 앗수르 왕조가 무너지면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는데,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남유다 사람들은 ‘혼합종교에 물든, 혼합혈통을 가진 저급한 인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로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남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해왔던 것입니다. 이런 사마리아인이 지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길을 사마리아인이 가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상상해보세요. 이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어떤 봉변을 당했을까요? 어떤 유대인들은 손가락질을 하고 욕을 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 사람의 목적지는 여리고였습니다. 여리고에 도착하게 되면 그는 또 어떤 취급을 당했을까요?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선 이 사마리아인이 여행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33절). 헬라어로 ‘여행하는 중’이라는 단어는 ‘내려가다가’와 같은 행위를 뜻하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여기도 보고 저기도 보며 어슬렁거리며 내려가다가’라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 역시 손에 든 것이 많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탈 짐승도 있었고, 여비도 있었고, 기름과 포도주도 있었습니다(34-35절). 그런데 왜 그는 무시무시한 붉은 피가 흐르는 골짜기를 여행하듯 어슬렁거렸을까요? 그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하는 두 그룹을 극명하게 비교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유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시간도 있고 돈도 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여유를 가지려면 뭔가 좀 넉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목적과 의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듯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천천히 그리고 찬찬히, 사색하듯 여행하듯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보이는 것이 있고 들리는 것도 있고 느껴지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것을 향해 진격하듯 살아가나요? 물론 그것이 정말 급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겠습니다. 욕심껏 사는 인생이기보다는 여행하듯 살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뜰히 보살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율법교사에게 되물으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이것은 “너는 네 이웃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가 되어야 이웃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있지? 그런데 너는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니?” 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의 좋은 이웃일까?” 이 물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사마리아인처럼 여행하듯 살아야겠습니다. 욕심과 욕구로 가득한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달리 산책하듯 살아야겠습니다. 「예배음악」을 사랑하시는 독자들께 여행하듯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가득하시길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사랑합니다.

 

lee이상억
이상억 목사는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이자 평생교육원장, 장신리더십아카데미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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