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호]한국교회에 ‘악보’를 선물한 언더우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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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음악 6월호는 언더우드 선교사 타계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흔적인 『찬양가』의 특징과 의미, 그리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교회음악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찬양가』안에는 그의 열정과 한국교인들을 향한 진심어린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영문 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부터 한국교인들의 신앙고백을 담고자 했던 마음, 그리고 찬양을 통해 올바른 신앙을 성립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선교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이번 예배음악이 만난 사람들에서는 특별히 언더우드 선교사님을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만나봤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답변은 언더우드 선교사님과 『찬양가』의 대한 기록들을 토대로 왜곡이 없도록 구성하였습니다.

 

예배음악.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저 우리나라 한국과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해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처음에는 인도 선교를 꿈꾸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한국선교로 방향을 바꾸게 되셨는지요.
언더우드 선교사님. 네. 저의 한국행은 한국을 사랑하시고 한국을 구원하기 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죠. 저는 원래 뉴욕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했습니다. 1881년에 뉴저지 주에 있는 뉴브런즈윅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도의 길을 걷게 된 후부터 해외선교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뉴브런즈윅 신학교는 미국 독립전쟁 직후에 만들어진 북미 최초의 신학교였습니다. 독립정신에 따라 이 학교를 설립하신 존 헨리 리빙스턴 박사는 노예 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셨고 해외 선교도 중요시하셨던 분입니다. 1800년도 초반에는 졸업생의 15%가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제가 한국 선교의 부름을 받은 것도 이 학교 재학 당시였습니다. 일본에 주재중이였던 올트맨이 1883년 겨울에 선교지원자들을 모아놓고 한국에 관하여 설명해주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한국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또 1882년에는 한미 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었음에도 미국교회가 무관심하여 1년이라는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으로 갈 사람을 찾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인도에 갈 생각으로 의학공부를 했었고, 한국에 갈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또 교회 기관지들은 아직도 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바로 그때 저에게 하늘의 메시지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왜 못가느냐” 그런데도 인도에 대한 선교 희망이 한국행을 막고 있었고 또 실제로 한국의 문은 닫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두 차례나 선교본부에 가서 한국행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핀잔을 들었죠.
이제 저는 미국에 머물러 목회를 하거나 인도에 가는 길 밖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뉴욕의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고, 저는 그 청빙에 응하기로 하고 수락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 처음보다 더 강한 메시지로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는가, 한국은 어찌할 터인가?”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때 저는 손에 쥐었던 편지를 저도 모르게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단숨에 선교본부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석서기였던 엘린 우드를 만났고 며칠 후 그에게서 제가 다음 회의에 선교사로 임명될 것이라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게 1884년 7월 28일이네요. 그때 제가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교목사로 임명되는 데 합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을 향한 발걸음을 Ep게 되었습니다.

예배음악.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한국에 들어오시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 선교목사 임명을 받은 1년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한국말을 공부하고 한국 지식을 습득하여 선교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혹 여의치가 않아서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한국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될 시기를 기다리며 일본에서 영어학교 사업이라도 할 생각이었습니다.
일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선교사님을 만나 그분의 집에서 기거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 풍습과 문화를 익혔고, 특히 이수정 씨를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보통 선교사들이 피선교지에 들어가서야 그 나라말을 배우게 되는데 저는 한국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국말로 번역된 성경을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한국 선교 준비를 마치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 아침에 드디어 감리교 선교사님이셨던 아펜젤러 선교사님과 함께 한국 땅에 첫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예배음악. 선교목사로 임명되어서 한국에 들어오시기까지 정말 많은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 준비과정이 한국 선교를 잘 감당하실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라고 생각됩니다. 선교사님께서는 선교과정에서 한국 최초의 찬송가 악보집을 만드셨는데요, 최초라는 것은 선교사님이 『찬양가』를 만드시기 전에는 악보로 된 찬송가가 없었다는 말인데요, 그렇다면 악보집 찬송가를 만드시기 전에 한국교인들은 찬송을 어떻게 불렀었나요?
언더우드 선교사님. 한국말을 배우고 들어와서 교인들의 찬송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 뜻도 잘 모르는 중국어로 된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글 성경과 한글 찬송가 편찬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한국에서는 중국과 일본을 통하여 기독교가 들어와 있었고, 한글 성경과 변역 찬송가도 소통되고 있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국경 지역인 만주에서 장로교 선교사님들을 통해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들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전도를 시작하였지요. 그 중에는 저의 『찬양가』 찬송에 작사를 한 백홍준 장로도 있었습니다. 중국 선교사님들께서는 세례를 받은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만주에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시고 출간하셨습니다. 역시 번역된 성경은 한국으로 들어온 기독교인들을 통해 소통되었습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한국어성경이 들어왔었지요. 그래서 제가 이수정 씨를 통해서 그 한국어 성경을 얻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요.
한국 최초의 찬송가집이라고 하는 감리교 선교사님들이 만든 『찬미가』 이전에는 중국 찬송가와 영어 찬송가를 번역하여 불렀습니다. 중국 찬송가는 제가 공식적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불렸고, 영어 찬송가는 저희들이 입국한 후에 개별적으로 번역되어서 불렸습니다.
중국 찬송가를 번역하여 부르는 것에 큰 문제점이 있었는데, 한자를 번역하여 부르다보니 한국 문인들조차 그 원문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중국식 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처음에 교회에서 얼마동안 써 보았으나 한자를 번역한 찬송은 가사의 의미 전달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당시 『찬양가』를 편찬하기 전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예배음악. 이런 모습들이 선교사님께서 악보집 찬송가를 만드신 계기가 된 것인가요?
언더우드 선교사님. 당시 한국교인들의 모습이 찬송가를 만들게 된 계기가 맞습니다. 더 붙여서 말씀드리자면 저희의 초기 선교 활동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과를 이루면서 교인들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찬송가를 필사하거나 가사를 족자에 써서 벽에 걸고 부르는 옛 방식에 한계가 드러났죠. 그래서 책으로 된 찬송가가 요구되었습니다. 다른 교파에 비해 제가 속해 있던 장로교와 함께 들어온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속해 있던 감리교가 찬송가집을 좀 더 빨리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편찬한 『찬양가』는 한국 최초의 악보로 된 찬송가입니다. 당시 한국에는 오선 악보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감리교 선교사님들이 만드신 『찬미가』도 악보판이 아니라 가사판으로 만들어졌고요. 사실 악보판으로 만들고 보니 악보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교인들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래서 초판만 악보판으로 만들었고 이후에 나오는 나머지 판들은 모두 가사판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아쉬운 부분이죠. 악보를 읽을 수 없었던 한국 교인들 중에 선교사님들이 드물었던 지방 교회의 교인들은 일주일 혹은 2~3달씩 찬송가를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기도 했습니다.

예배음악. 한국 최초의 찬송가 악보집 『찬양가』를 내시면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 돌이켜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마다 이 작업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감리교와 저희 장로교가 함께 연합찬송가를 기획하고 편찬하기로 했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님들께서 1892년에 한국 최초의 『찬미가』를 출간하셨고, 저희 장로교도 찬송가집의 편찬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와 감리교의 양 선교부는 새롭게 편찬할 찬송가집을 연합하여 편찬하기로 합의하고, 감리교에서는 존스 선교사님과 장로교에서는 마펫 선교사님 책임 하에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작업은 먼저 당시 양 교파에서 개별적으로 번역하여 사용하던 찬송가 50곡을 수집하는 것부터 진행되었습니다. 찬송가집의 편찬 작업은 저와 감리교 존스 선교사님이 맡았는데, 존스 선교사님께서 안식년으로 미국에 들어가시면서 찬송가집의 편찬 작업이 지연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찬송가집 출간에 대한 재촉이 있어서 1894년 저희 장로교에서 먼저 『찬양가』라는 서명으로 출간하였죠. 그런데 출간된 후 편집 과정이 쟁점이 되어서 『찬양가』는 양 선교부의 공인을 받지 못하고, 서울의 일부 장로교회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도 편집 과정 측면에서만 보면, 한국 기독교사에서 최초로 시도된 연합 찬송가집입니다. 이후에 1908년 최초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 찬송가집인 『찬숑가』가 편찬이 되면서 『찬양가』 출판을 중지하였습니다.
편집과정에서는 번역에 대한 부분의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찬양가』는 총 117편의 찬송으로 이루어졌습니다만 그중 25편만 제가 직접 번역을 하였고, 다른 번역곡도 상당수 제가 재번역 하였는데요, 편집 과정에서 다른 선교사님들의 번역을 수정하여 제가 다시 개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영문 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어려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선율과 발성이 소개되어 있지 않거나 그런 형태의 운율과 음절 표시의 전통이 없는 한국에 음악 자체를 새롭게 전수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선율에 한국어 가사를 한글로 붙여야 하는데, 여기에서 운율도 문제였고, 음절의 분철과 표기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인 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예배음악. 그렇다면 이렇게 어렵게 편찬하신 『찬양가』가 한국과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언더우드 선교사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님들의 헌신의 열매들을 귀히 사용하셔서 한국과 한국교회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한국과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예전이나 지금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역사하신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있습니다.
먼저 한글 보급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근대 계화 계몽운동의 과정 속에서 외세에 대응하기 위해 독립 의식이 강조되고 봉건적 사회제도를 벗어나기 위해 사회 문화적 변혁이 요청되자, 국어 국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한국 언어에 대한 독자성이 민족성을 유지하는 상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한문체로 상징되는 봉건 지배문화의 붕괴는 국어 국문체의 확대 사용으로 이어졌고, 신식 교육이 실시되면서 국어 국문이 한국민족의 독자적인 문자로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갑오개혁 이후 조선 정부는 모든 법률 및 칙령을 한자와 국문을 같이 사용하여 발표하게 되었고, 국가가 실시하는 모든 시험에 국문이 정식과목으로 결정 되었습니다. 또한 국문 교과서를 편찬하는 편집국들이 신설되었고, 잡지, 신문, 서적 등이 한국어로 출판되었습니다. 이러한 한국어의 확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기독교의 성경과 찬송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인들은 성경을 구하기 전에 먼저 찬송가집을 구입하고 특히 여성들은 찬송가를 부르기 위해 한글을 깨우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찬송가의 가사가 전부 한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곧 찬송가는 성경보다 한글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서양음악 전파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선교사님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하신 일들 중에 근대적 학교를 세웠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체계적인 서양음악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만 교육이 가능하였습니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찬송가가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교육이 학생들의 서양음악 교육을 담당했다면, 교회의 찬송가는 일반 국민들에게 서양의 음악을 접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죠. 아마 저희가 들어오기 이전에 한국교인들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찬송가를 부르면서 서양음악을 접했을 것입니다. 비록 바르게 부르지 못하였을지라도 그것은 찬송가를 통한 서양음악과의 최초의 만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찬송가가 기독교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찬송가를 개사하여 애국가와 계몽운동 노래로 부르게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서양음악을 한국 국민들 속으로 보급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예배음악. 그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찬양가』를 통해서 저희들에게 부탁하실 말씀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찬송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우리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고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면, 그에 대한 기쁨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일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찬양은 높은 자리에 있든지 천한 자리에 있든지 지위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인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 『찬양가』는 한국교회와 한국교인들을 위해 만들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이들을 통해 찬양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위함에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을 찬양하여 찬양의 기쁨이 우리들 마음 가운데 더 감동하기를 바랍니다.(찬양ᄒᆞ야 모든 교형들의 흥긔ᄒᆞ는 ᄆᆞ음이 더 감동ᄒᆞ기를 ᄇᆞ라노라-언더우드, 『찬양가』 서문 마지막 문장)

 

이병호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음악과에서 성악전공, 협성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합창지휘를 전공하였다. 현재 서소문교회 4부 갈보리찬양대 지휘자, 화성시소년소녀합창단 부지휘자, 서울챔버싱어즈에서 사역하며 교회음악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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