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호] 교회 음악(찬양)의 영적 의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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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음악과 교회 음악은 같은 소재와 연주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같은 범주로 분류된다. 하지만 영적 신학적 의미로 본다면 일반 음악과 교회 음악은 그 목적과 가치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새 노래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Sing to the Lord a new song!)” (98:1)

교회음악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단어를 성경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나는 ‘새 노래’라는 단어를 택할 것이다. ‘새 노래’야 말로 교회음악의 정체성을 가장 확실히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 노래’는 ‘새로 작곡된(newly written) 노래’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영적으로 볼 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여기서 말하는 ‘새(new)’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새로 만들어 진 것(brand new)’의 의미가 아니다. ‘새(new) 것’이라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새 사람(new creation in Christ)’이 느끼는 감정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옛 자아(old self)가 죽고 새 자아(new self)로 다시 태어나게 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진다. 같은 사람을 보는데도 다르게 느껴지고, 그동안 그렇게 힘들었던 어려움도 더 이상 시험거리가 아닌 은혜로 여겨진다. 이러한 새로운(new) 감정들은 ‘노래’에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새사람이 되고 보니 어제 불렀던 똑같은 노래도 전혀 다른 노래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노래가 ‘옛 노래(old song)’도 되고, ‘새 노래(new song)’도 되는 일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노래는 아무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음악을 잘 안다고 해서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작곡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해서 새 노래를 작곡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새 노래는 반드시 부르는 사람이 먼저 ‘새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선행조건이 있다. 매일 같은 노래를 불러도 새 사람이 부르면 매일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새 노래이다. 주의 인자가 아침마다 새로운 것처럼(애 3:23) 같은 노래라도 우리에게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은혜를 통하면 날마다 ‘새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 노래’를 다시 정의해 본다면 ‘새 노래는 새 피조물(새 사람)이 부르는 노래’이다. ‘새 노래’를 ‘새 노래’되게 하는 것은 그 곡을 쓴 작곡자나 작사자가 아닌, ‘부르는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교회 음악은 ‘음악 자체’에 관한 문제가 아닌 ‘사람’에 관한 문제이다. 이런 면에서 일반 음악과 교회 음악은 가장 큰 차이점을 갖는다. 일반 음악은 연주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만, 교회 음악은 사람에게 더 큰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주자가 멋진 레퍼토리를 예배 중에 연주했다 하더라도 연주자 자신이 ‘새 피조물’이 아니면 그 음악은 교회음악이 될 수 없다. 교회음악은 레퍼토리나 연주 장소로 규정되는 것이 아닌 오직 연주자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음악’과 ‘새 노래’에 대한 정확한 규정 없이는 ‘교회음악’에 대한 어떤 논의도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교회음악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사람’이지 ‘음악 자체’가 아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4:4~5)

하나님은 제물을 받으시기 전에 사람을 먼저 받으셨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서 ‘그의 제물’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제물의 내용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제물을 누가 드렸느냐?’ 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이라서 아벨의 제물과 가인의 제물을 율법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누구의 제물이 더 옳았는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물 이전에 사람을 보셨다는 것이다.

또 훗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아도 사람이 먼저라는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백성)’의 모습을 기대하시고 주신 것이지, 사람과 전혀 관계없이 그냥 무조건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결국 율법의 정신도 그 중심에 ‘사람’이 있고, 창세기 4장의 아벨과 가인의 제물도 그 중심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제물이나 예배 의식, 예배 음악보다는 ‘사람 자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음악에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노래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노래하느냐?’이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1~24)

아모스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찬양을 안 받으신 이유는 음악의 수준이나 질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하나님께서는 음악보다 사람에게 더 큰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할 때, 그들의 성회나 절기, 번제나 소제, 노래, 악기 소리, 그 어떤 것도 받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와 찬양의 선행조건을 분명히 발견한다. 예배자와 찬양하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을 먼저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동떨어져 있다면, 아무리 수준 높은 음악이 연주되더라도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음악의 가장 주안점은 음악보다는 사람에 있어야 한다. 훌륭한 음악을 연주하는 일에도 힘써야 하지만, 찬양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들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롬 12:1) 드리도록 돕고 힘쓰는 것’이 음악 목회와 교회음악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무리하며

교회 음악과 일반 음악이 비록 같은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목적과 가치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교회 음악이 사람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하고 연주에만 치중하게 된다면, 스스로 그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새 사람이 부르는 새 노래’가 되기 위해서 ‘새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새 은혜’를 날마다 구하며 삶 전체를 산 제사로 드리기에 힘쓰는 자들이 먼저 되어야 그것을 맡은 사람들의 교회음악이 비로소 가치와 능력을 찾게 될 것이다.

김은찬 조교수 사진김은찬
총신대학교에서 지휘를 전공하고 교회음악을 위한 신학적 바탕을 쌓기 위해 동 대학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전공했다. 이후 말씀을 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느껴 목사 안수를 받고 말씀 사역을 하던 중,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미국의 남침례 신학 대학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회음악 석사와 박사를 마치게 되었고, 2010년에 귀국하여 광주 동명고등학교 교목을 거쳐 현재는 총신대학교 교회음악과에서 조교수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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