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호] 미래 교회의 대안 블렌디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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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한국교회가 향후 10년 동안 추구해야 할 예배는 어떤 형태인가? 정답은 없다. 다만 일관성 있는 방향을 그려 낼 수는 있으리라. 필자는 그 그림을 블렌디드 예배로 본다. 이 그림에 색깔을 입히기 전에 먼저 스케치해야 할 뼈대가 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기독교 예배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필자는 최근의 예배현상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예배의 가벼움’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전통예배는 졸지 않고 잘 참고 견뎌내야 하는 학교 기념식 수준으로 화석화 되었고, 현대예배는 정제되지 않은 시끄러운 밴드음악과 탁월성이 사라진 채 지나치게 개인 경험을 충족시키는 집회양식으로 바뀌었다. 이즈음에서 우리는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를 기독교역사와 신학, 그리고 시대적 안목으로 재점검해야한다.

게토화 된 한국교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절대적인 종교가 사라지고 모든 가치가 상대화 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는 마치 전 세계가 저마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구도하고 예배하는 인류 최고의 종교시장화 되어가는 듯하다. 종교보다 이성이, 신보다 과학이 우위하던 모더니즘 시대의 합리주의적 가치는 이미 한물간 박물관 유물이 되어가고, 오히려 이성보다 경험이, 과학보다 종교적 가치가 인정받고, 이를 추구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즉물적 세계관이 시대정신의 우위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무엇이 진짜냐를 추구하기를 포기하고 무엇을 느끼느냐를 중시하여 그 말초적 감각을 찾아다닌다.

새로운 시대정신과 변화된 종교적 가치들이 판을 치는 21세기 세상은 오히려 기독교에게 더 없는 복음전파의 기회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세상과 담을 쌓고 게토화 되었으며, 오히려 세상의 변두리로 쫓겨나 힘을 잃고 움츠려 있다. 예배를 말하면서 왜 게토화를 먼저 다룰 수밖에 없는가? 기독교 예배는 그 시대를 반영한다. 왜냐하면 예배는 기독교신앙의 꽃이고 앞문이며, 종합예술이다. 그래서 예배는 세속사회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심으며 그 위대한 가치가 땅 끝까지 펼쳐 나아가는 광대한 비전을 예배 회중에게 그려준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목회의 현장에서 이 예배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눈물로 헌신한 결과 예배 때마다 천국을 경험하는 영광을 재현해 왔다. 그러나 불과 90년 전, 한국사회에서 존경받는 리더십 그룹에 5%도 안 되는 기독교인들이 그 중심에 있던 것에 비해 지금은 기독교 인구 20%가 넘는 사회에서 그 리더십이 땅에 떨어졌다. 기독교 베스트셀러 책은 기독교인들끼리 회자되고, 또 기독교 저자들도 천만 기독교인을 타깃으로 책을 쓰는 것이 당연한 기독교 문화이다. 우리끼리 영적 슈퍼맨을 만들어 놓고, 우리끼리 존경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동안 축적한 재산으로 거대한 교회 건축물들이 구축되어 있다. 중산층이 무너진 한국사회의 기저인 서민들에게 오히려 위화감만 주는 종교적인 부, 그런데 그 안에서 간간이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결과물들은 세상의 도덕기준보다 못하며, 차마 코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악취가 진동한다. 결국 사회는 그들만의 언어와 그들만의 은혜로 만들어진 도그마를 점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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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예배의 가벼움
이것은 기독교의 참 모습이 아니다. 일그러진 교회의 일면일 뿐이다. 목사로서,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부끄러운 오늘의 교회 현실을 통회 자복하는 마음으로 토해낸다. 아울러 예배 전문가의 양심으로 단언하건데, 이 책임은 한국교회의 ‘참을 수 없는 예배의 가벼움’에서 비롯되었다고 감히 도전한다. 수많은 교회들이 예배의 현장에서 빛바랜 하나님 나라를 토해내고 있고, 현실도피성 영생복락과 샤머니즘적 구복신앙으로 균형 잃은 복음을 남발한다. 기존의 젊은이들은 화석화된 예배에 등을 돌리고 신비스러운 가톨릭 미사로 전향한다. 구도자들이 어쩌다 방문한 교회에서 경험하는 주일예배는 우리 끼리만의 언어, 아마추어 밴드의 시끄러운 반주, 찬양인도자의 설교성 멘트, 천국의 거룩함과 아름다움, 탁월성이 사라진 이 등급에 중독된 예배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현대예배는 지나친 청중의식, 자극적인 감정주의, 젊은이를 끌어들이는 미끼 등과 같은 불온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교회성장을 위한 필요악 정도로 치부하는 등 불안전한 유행 현상으로 그칠 우려가 있다.

또한 예배의 초월성과 경외감이 약해졌다. 물론 예배 안에는 ‘친구 되신 하나님’, ‘사랑하는 하나님’, ‘나를 만지시는 주님’과 같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예배, 전통예배 할 것 없이 오늘의 예배가 추구하는 가치는 지나치게 내재적이다. ‘나의 필요’, ‘내 공허함을 채워주시는 주’… 내가 중심이다. 내가 체험해야 만족하는 예배가 되어 버렸다. 그 어떤 예배라도 하나님의 거룩성과 초월성, 경외감과 신비감이 내재성과 함께 균형 있게 표현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예배가 아니다. 자칫 요즘 웬만한 한국드라마의 찐한 감동보다 못한 2등급 사랑이야기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예배양식 변화의 핵심원리
왜 우리는 예배의 영광을 잃어 가는가? 그것은 예배의 본질보다 예배의 양식에 너무 진을 뺐다. 예배의 양식은 예배의 본질을 더욱 본질 되게 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배양식의 변화에 대한 갈등은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존재했다. 캔트 R. 헌터(Kent R. Hunter)는 말한다. “1800년대 초에 마인즈(Mainz) 대성당의 음악감독인 조지 웨버(George Webber)는 캐럴의 고전인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저속하고 해악스럽다’고 표현했다. 믿음의 진리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달방식인 예배양식은 각 세대에 복음이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 꼭 바뀌어야 한다.”(Kent R. Hunter, Move Your Church to Action (Abingdon Press, Nashville, TN, 2000)

지금도 예배는 논쟁적인 이슈를 항상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예배 회중을 위한 성경적인 원리를 이해하고, 규정함으로 적합한 예배양식을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지역교회 예배인도자나 목회자가 꼭 다뤄야 할 중요한 원리는 내용(content)과 구조(structure) 그리고 양식(style)에 대한 이해이다.

로버트 웨버는 말한다. “기독교 예배의 내용은 당연히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이것은 타협할 수 없다. 가장 권고할 만한 예배의 구조는 4중 구조이다. 이는 성경과 역사, 그리고 특히 초창기 6세기 동안의 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예배의 스타일은 얼마든지 그 다양성을 고려할 수 있는 문제이다.”(Robert Webber, Planning Blended Worship, 20ff)

모든 세대,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 적합한 한 가지 스타일의 예배란 존재할 수 없다. 그 대신 변화하는 문화의 패턴과 양식에 따른 시간과 장소에 따라 예배의 양식은 다양하게 바뀔 수 있는 것이다.

100명 이하 교회의 예배를 살리라.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예배양식의 모델은 무엇인가? 년 초에 한국의 모 예배인도자학교의 커리큘럼을 보면서 놀란 적이 있다. 대부분의 강사들이 한국의 초대형교회 예배사역자들이었다. 물론 이 단체의 책임자가 작은 교회를 최대한 배려해서 강의한다는 말에 다소 안심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형교회의 강사들이 100명 이하의 작은 교회들을 위해 실재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이처럼 예배의 모델교회는 거의 대부분 초대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대형교회 지상주의는 심각한 병폐를 낳는다.

최근 한국기독교학회에서 개최한 ‘한국교회의 위기와 신학적 답변’에서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는 한국교회가 기독교 120년 역사 가운데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는데 이 같은 병리현상의 요인을 ‘교회의 대형화와 익명성’으로 지적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가 되어야 성공한 교회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대형교회 예배가 성공한 예배처럼 보인다. 그래서 저마다 대형교회의 예배형태, 무대양식, 사역시스템, 훈련 프로그램, 건축양식, 인테리어를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예배사역도 대형교회이기 때문에 되는 것이 많다. 대형교회는 인적자원, 재정, 자료, 시스템 등 모든 면에서 소형교회와 비교할 수 없이 풍족하기 때문에 원하는 사역이 훨씬 쉽게 성취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현실은 교회의 80% 정도가 100명 이하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80%는 항상 100명 이하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형교회의 예배만 온전한 예배가 되고, 80%나 되는 소형교회 예배는 항상 상대적인 결핍감을 갖고 모자란 예배(?)를 드려야 한단 말인가? 어불성설이다. 소형교회도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의 영광을 예배가운데 경험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은 5천 명이 모이는 교회나, 50명이 모이는 교회나 비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 2-3사람이 모인 곳이라도 똑같이 가치 있게 여기신다.

대형교회 중심의 예배갱신, 과감하게 탈피하라.
회중이 많다고 예배의 질이 깊어지지 않는다. 즉 회중의 숫자와 예배의 질이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필자가 부 디렉터로 4년간 섬겼던 한국 컨티넨탈싱어즈는 겨울 사역 때마다 7일간의 리허설 캠프를 갖는다. 항상 주일이 끼기 때문에 그때마다 30여명 단원이 조촐하게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린다. 설교도, 찬양인도도 리더십이나 단원이 한다. 악기는 기타와 피아노가 전부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겉은 비록 초라한 예배였지만, 예배할 때마다 수백 명, 수천 명이 함께 드린 그 어떤 예배보다 더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눈물의 예배가 된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예배학을 공부하며 그 이유를 뒤 늦게 깨달았다. 예배의 다이나믹은 한 교회 공동체 회중의 친밀도에 비례함을 깨달은 것이다. 즉 예배 회중이 성령 안에서 서로를 깊이 알고, 친밀감이 형성되면 될수록 그 예배의 상호교환적(interactive) 교감이 상승되고, 예배의 생명력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필자가 섬기는 예배관련 사역, 강의의 초점은 항상 100명 이하의 작은 교회의 찬양팀, 예배팀, 미디어, 예배인도자들이다. 작은 교회에서 어떻게 예배의 영광을 회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에 전율하는 살아있는 예배가 가능할까? 이것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필자의 주된 관심사이다.

우리가 드리는 거룩한 예배의 현장에도 세상에서 추구하는 빈익빈 부익부의 가치가 나도 모르게 침투해 있지는 않은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소형교회들이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를 생각해보았는가? 하나님께서 너희는 아직 100명이 안 되었으니 30점, B교회는 이제 200명이 되었고 찬양팀도 잘 구성이 되었으니 50점, C교회는 드디어 1000명을 돌파했고 찬양팀도 전문적인 풀타임 연주자들로 채워졌으니 85점… 이런 세속적인 가치가 예배의 현장에 그대로 통한다면 통탄할 노릇 아닌가! 왜 수천 명, 수만 명 교회의 예배를 모델로 삼는가? 왜 대다수의 소형 교회들마다 최첨단 빔 프로젝트와 최고의 음향 기기들이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가? 그렇게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신자들이 오질 않는단다. 교인들을 첨단 악기와 기자재로 버릇 들여서야 되겠는가? 언제부터 한국교회가 교인들의 눈치를 보며 목회를 했는가? 예수님께서 회중의 눈치나 보며, 그들이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라고 교회를 세우셨는가? 뒤틀린 현대교회 예배의 현장을 바로잡아야 한다. ‘참을 수 없는 예배의 가벼움’을 뒤집어야 한다.

"WHY" 3D text surrounded by question marks. Part of a series.

왜 블렌디드예배인가?
필자는 소형교회 예배의 대안을 블렌디드예배로 본다. 100명 이하의 작은 교회에서 젊은이들의 현대예배, 장년들만의 전통예배를 따로 드린다는 것은 인력낭비요 소모전이다. 물론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블렌디드예배를 미래교회의 대안으로 보고 싶다.

본격적인 블렌디드예배 현상이 처음 출현한 것은 1990년대 미국에서였다. 북미의 1960년대는 독특한 시기였다. 전통 예전, 가톨릭, 오순절, 은사주의 및 찬양과 경배 등의 예배갱신 운동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 운동은 크게 경배와 찬양, 오순절, 은사주의를 중심으로 한 조류를 형성했고, 가톨릭과 전통예전의 갱신운동이 또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여 흘러가다가, 90년대 이후에 이 두 가지 흐름이 하나로 수렴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블렌디드 예배(blended worship)이다.

현재 미국교회는 현대예배와 전통예배, 그리고 블렌디드 예배 양식이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서 각각의 개 교회의 형편과 상황에 맞게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다. 2001년에 발표한 Your Church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주도적인 예배양식은 43%인 블렌디드 양식인데 반해 현대예배는 22%, 전통예배는 27%였다. 3년 뒤인 2004년에 다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블렌디드 양식이 37%로 줄어든 반면, 전통양식이 31%, 현대적 양식이 32%로 상당히 상승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미국인들은 이미 40년 이상의 대중음악의 경험 속에서 현대적인 양식의 음악에 훨씬 많이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블렌디드예배란?
블렌디드 예배란 전통예배와 현대예배를 서로 접목한 예배이다. 쉽게 표현하면 경배와 찬양과 성가대가 함께 하는 예배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모두에게 적합한 예배이다. 한 예배 컨퍼런스에서 “가족 중심의 예배”라는 강의를 들었다.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 되기 위해서는 신세대와 구세대를 함께 포용할 수 있는 예배인 블렌디드예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강의가 끝나자 그 자리에 있던 60여명의 미국교회 지도자들이 아낌없는 박수로 동의했다.

그렇다면 블렌디드예배 양식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옛 양식과 새 양식을 섞는 것인가? 옛 음악과 새로운 음악을 섞는 것인가? 순서를 몇 가지 바꾸는 것인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필자는 블렌디드예배를 우리시대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과거의 예배 유산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예배라고 본다. 이러한 정의 속에서 예배를 디자인 할 때 우리는 훨씬 자유함 속에서 움직일 수 있다. 현대 예배음악을 중심으로 전통적 요소를 가미할 수도 있고, 전통적인 예배를 토대로 현대적 경배와 찬양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 두 가지 요소를 균형감 있게 배치함으로 젊은 층과 장년 층 모두에게 적절한 접근이 가능한 예배를 디자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고전과 현대의 예배양식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시작할 때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예배의 리소스들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교회는 매주 이전에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훨씬 다양하고, 풍성한 예배를 맛 볼 것이고, 회중이 경험하게 될 예배의 넓이, 깊이, 높이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 예배 설문조사 결과
2002년도에 리버티 신학교에서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예배인식 설문조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설문대상 교회를 선정할 때 몇 가지 기준은 첫째, 교회의 사이즈와는 상관없이 한국과 미국에 있는 건강한 사역으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 둘째, 한 교회 안에 전통예배와 현대예배가 공존하는 교회, 셋째, 블렌디드 예배가 있거나 현대예배를 시도하려고 준비하는 교회 등이었다. 이 설문에 참여한 교회는 사랑의교회(옥한흠 목사), 호산나교회(최홍준 목사), 새중앙교회(박중식 목사), 일산 은혜교회(강경민 목사), 미국 쪽은 펠로우십교회(김원기 목사), 한빛지구촌교회(장세규 목사), 빌립보교회(송영섭 목사) 등 총 13교회 702명이 응답했다.

이 설문의 결론을 3가지로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첫째, 평신도들이 예배의 변화를 위해 열려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배 경험에 매우 목말라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하나님을 경험케 못하는 예배의 위험을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단순이 우리 조상이 했다는 것만으로 그냥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예배 개념, 새로운 구조와 새로운 폼, 더 나아가 새로운 스타일을 필요로 했다. 둘째는 나이별 응답자 분포도가 40대 46%, 30대 23%, 50대 13%로써 거의 70%나 되는 표본그룹이 3-40대이다. 이는 다행스럽게 이 설문의 결과가 한국교회를 가장 활발하게 섬기는 교회의 허리요 중추 그룹을 대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이들의 주도적인 관심은 블렌디드예배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블렌디드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쉽게 경험하게 해준다(48%)와 서로 다른 세대를 하나로 묶어준다(48%)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또한 대다수의 응답자가 자신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가장 많이 준 예배양식을 블렌디드(70%)로 보았고, 현대(13%), 전통(8%)은 현저하게 낮았다. 응답자들의 대다수(80%)가 블렌디드 양식의 예배가 미래교회의 예배로 정착될 것이라고 대답한 것을 보면 이미 건강한 한국교회 허리에 해당하는 중년 평신도들은 형식과 전통에 얽매이기보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예배형식에 활짝 열려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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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디자인 개혁 포인트
그렇다면 우리가 기존의 전통예배에 새로운 현대예배 요소를 첨가한 블렌디드 예배를 기획하려고 할 때 어떤 신학적인 기준에 의해 예배를 디자인할 수 있는가? 북미 예배학계에는 이미 우리와 동일한 고민을 안고 시도한 연구결과를 여럿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한 문헌을 소개한다. 1997년 북미 기독교개혁교회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추구해야 할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연구했고, 그 결과 ‘변하는 문화속의 진정한 예배’(Authentic Worship in a Changing Culture – Emily R. Brink who is ‘Music and Liturgy’ editor in CRC Publications said, this book “reflects the dedicated efforts of a seven-member Worship Study Committee that prepared a report for the 1997 Synod of the Christian Reformed Church. That report forms the core of this study edition) 라는 책이 탄생했다. 이 책은 기독교개혁교단(CRC)의 연구결과로 시작되었지만, 여기서 다룬 이슈들은 모든 다른 교단의 크리스천들에게 적용될 만큼 일반적이다. 이 책은 특별히 예배의 개혁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 가운데 8가지 항목 (Authentic Worship in a Changing Culture, CRC Publications, 1997.)만 다루고자 한다.

  1. 예배와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 그 아들, 성령의 3위는 예배에 생생하게 관여한다. 이는 타협할 수 없는 기독교 예배의 핵심진리요 기본 축이다.
  2. 예배 안에서 설화체의 중요성. 기독교 예배는 매우 설화적이며 극적이다. 강림절, 성탄절, 예수 현현일,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성례전, 침례식, 성찬 등 교회력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예배 가운데 사용되고 있지만, 오늘의 예배가 더욱 이야기체(narrative)로 개발될 필요가 있다.
  3. 성찬과 성례전 예배. 예배 안에 성례전의 본질이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성도의 모임에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성만찬을 할 것을 적극 권장했다.
  4. 예배의 영원한 구조. 4중구조이다. 교회 전체의 역사를 통한 기독교 예배 연구 결과 반복 되어 드러나는 예배구조의 패턴은 4중구이다. 예배를 위해 나아감, 말씀의 선포, 주의 만찬의 시행, 섬김을 위한 파송 등이다.
  5. 지성과 온 몸. 창조의 풍성한 전망을 견지하는 개혁교회는 인간의 다양한 감각의 본질을 활용한 예배, 그리고 지적이거나 전 신체적, 추상적이거나 유형적 실재의 균형감을 추구하는 예배에 대한 핵심적인 신학적 근거들을 갖고 진지하게 개발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
  6. 음악적 상황은 항상 변한다. 교회는 교회 자신의 노래를 열정과 능력을 갖고 계속 불러야 한다. 교회는 음악적 표현의 변화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러한 변화를 목회적, 통합적으로 주의 깊게 품어주어야 한다.
  7. 예배와 전도. 공동체적 크리스천 예배는 일차적으로 믿음의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교회의 예배는 조금 이상해 보이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예수를 모르는 자들을 위해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교회는 방문자들과 구도자들에게 최대한 친절해야 한다. 예배의 변화는 외부로부터 강요되어서는 안 되며, 내적 동기에서 유발된 유기적 과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8. 회중 찬양. 확신컨대 회중찬양은 예배음악의 중심이며, 예배의 모든 부분에 녹아들어야 하고, 지나친 신중함의 발로로 회중찬양이 축소되거나 다른 형식의 예배음악에 의해 자리를 내어주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개혁주의 교단의 예배음악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의 잣대가 많이 누그러졌으며, 현대적인 양식을 대폭 수용하는 쪽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은 블렌디드
이제 한국교회는 아직도 예배의 영광을 잃지 않은 많은 교회들과 함께 성경과 역사, 그리고 예배신학의 견고한 기초 위에 새로운 현대예배 현상이 100년 동안 고수해온 전통예배 속으로 건강하게 수렴되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건강한 예배 원리와 철학, 예배매뉴얼과 예식서 등을 창조적으로 개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100명 이하의 소형교회, 1~900명의 중형교회, 1000명 이상의 대형교회, 5000명 이상의 메가 교회 등 다양한 교회 크기별 예배 모델을 개발하고, 각 단계별 모델교회를 발굴하여, 비슷한 크기의 다른 교회들을 위해 그 모델을 확산시키는 등 지역교회 예배갱신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들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필자는 블렌디드예배를 우리시대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과거의 예배 유산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예배라고 언급했다. 고전과 현대의 예배양식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시작할 때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예배 자료들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교회는 매주 이전에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훨씬 풍성한 예배를 맛 볼 것이고, 회중이 경험하게 될 예배의 넓이, 깊이, 높이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게 될 것이다.

블렌디드예배가 미래교회 예배의 대안이고, 평신도들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를 새로운 예배에 목말라 있다면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 형식과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예배형식에 혁신적이며 창조적인 태도를 갖고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고, 다음 세대를 위해 활짝 예배의 문을 열어주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종종 평신도들이 목회자들보다 예배를 더 잘 안다고 말한다. 즉 이들이 목사들보다 예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예배에 목말라 있다. 예배의 영광을 갈급해하고 있다. 만일 우리 세대의 교회지도자들이 이들의 목마름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100년 전 전통의 그늘 속에 안주하려고 한다면 다음 세대의 교회는 ‘참을 수 없는 예배의 가벼움’에 발목 잡혀 유럽의 교회들처럼 역사의 박물관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7-justinlee_sss이유정

연세대학교(BA), 총신대원(M.Div.), 리버티침례신대원(Th.M., D.Min.)을 졸업하고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로 10년을 섬겼다. 현재 리버티대학교 예배학 한국과정 주임교수와 예배사역연구소 소장으로, 현대 예배현상의 신학화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듀오 ‘좋은씨앗’이며, <오직 주 만이> 의 작곡가, 『잠자는 예배를 깨우라』와 교재 『성령의 지배를 받는 4일 예배훈련』을 집필하는 등 음악과 글로 예배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크리스천 아티스트이다. yjlee@liberty.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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