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예배음악 소고 – 신원섭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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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설교는 성경시대와 현대 청중 사이에 존재하는 최소한 2000년의 간격을 이어주는 교량이라고 말한다. 설교자는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예화도 사용하고, 적절한 해석과 적용을 가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여전히 따끈따끈한 생명의 복음으로 배달될 수 있도록 공을 들인다. 그것이 적절하게 전달되기만 하면 교량의 역할은 다한 것이다.

대개 찬양팀은 이어서 선포될 설교 주제와 맞는 성가를 부르려고 한다. 찬양이 끝나면 설교자가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설교로 이어진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찬양 자체가 예배가 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예배찬양은 설교로 건너가는 교량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음악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세상살이로 단단해진 청중의 마음에 단비를 내려주고, 부드럽게 갈아엎어서 선포되는 복음에 더 잘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교량과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정치적으로 왕이었을 뿐 아니라, 예배와 절기 때마다 영적인 인도자로서 찬양을 통해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역할을 잘 수행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34:1-3)

그리고 심지어 천사와 천군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의 영혼에게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인도하고 있다. 이런 찬양인도자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03:20~22)

그런데 내가 처음 어떤 찬양콘서트 현장에 갔을 때는 참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너무나 큰 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아서 예배당 입구에서 머뭇거리다가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와 버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내는 열광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어떤 이는 손을 흔들며 비명을 지르고, 어떤 이는 연주자들보다 더 펄펄 뛰면서 알아듣기 힘든 가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찬양이 예배 그 자체이다’라고 주장하든 ‘찬양은 예배로 들어가는 교량역할을 한다’고 하든 어떤 주장을 따르더라도 그날 그 찬양콘서트는 한 사람의 예배자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예배음악은 이제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연주실력과 녹음의 품질, 그리고 대중동원 능력을 자랑한다. 실제로 음반제작을 미국 내쉬빌에 가서 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그리고 일부 유명 찬양사역자들은 찬양과 가요계를 넘나들면서 명성을 얻고 양쪽에서 왕성한 활동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과거 고전주의 시대에는 기독교음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음악의 전부였다. 그러나 당시의 음악은 소수 연주자들의 전유물이었고, 청중은 그저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고 새로운 곡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지 않아서 부모의 세대나 자녀의 세대가 같은 곡을 듣고 부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음악은 이전 어느 세대와 비교할 수 없는 ‘생산성’으로 하루에도 수 십편씩 새로운 노래들이 쏟아져 나오고, 교회마다 풀세트로 악기와 음향을 갖추고 직접 연주하고, 심지어 직접 생산한 노래들을 부르고 있다. 결코 다 배워서 부를 수 없을 만큼의 신곡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화려함, 생산성, 그리고 음악의 품질은 점점 높아지는 반면 영적인 내면은 그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교회를 보는 세상 사람들의 평가이다.

노래방에 가면 누구나 “나는 가수다.” 멋진 반주가 흘러나오면 너 나 할 것 없이 흥겹게 노래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렇게 실력과 영성을 겸비한 연주자들을 갖추지 못하여 노래방에서 만큼의 열정적 찬양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된 실제 예배현장에서는 지금도 세상에 나온 지 30년 정도는 묵은 노래들이 애창되고 있다.

신나는 전자악기의 반주가 있어야만 목청껏 찬양할 수 있고, 반주가 빈약한 곳에서는 마지못해서 “옥타브신공”을 (한 옥타브 낮춰 부르기)을 구사한다면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반주의 수준과 상관없이 우리의 삶이 찬양의 제물이 될 수 없다면 결코 신령과 진정의 찬양을 할 수 없다.

연주든 가창이든 복음을 담았을 경우에만 찬양이라 할 수 있다. 듣는 사람마다 제각기 해석할 수 있는 애매한 대상을 노래하는 것은 진정한 찬양이 될 수 없다. 연주자의 고백이 들어있지 않은 연주도 찬양이 될 수 없다. 신자가 아닌 연주자가 예배찬양을 연주하게 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필자는 예배찬양이 청중의 마음을 복음으로 이끌어 연결해주는 교량역할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교량에 접근하기 위해 또 다른 교량이 필요하다면 불필요한 허식만 길어질 것이다. 앞으로는 어쩌면 설교 앞에 찬양팀, 찬양팀 앞에 마술공연이나 연예인 간증 같은 관심집중용 이벤트나 프로그램이 일반화될 가능성도 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설교 메시지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할지 모른다. 더 이상의 교량은 필요하지 않다.

예수님은 심지어 거라사의 광인이 치유받은 후에 계속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간증으로 돕겠다는 제안을 사양하셨다(막5:18, 눅8:38). 바울도 빌립보에서 귀신들렸던 여종을 치유하기 전에 그녀가 바울 일행을 보고 널리 선전하며 따라다니자(행16:17), 그녀에게 붙어 있던 귀신을 쫓아냄으로서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

예배음악은 예배여야만 한다. 예배에 들어가는 교량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예배여야 한다. 선명한 복음과 간증을 최대한 아름다운 선율과 적절한 비트에 실어서 전달하는 것이다.

요즘은 웬만한 일에는 음악으로 말을 한다. 월드컵 응원에서 기쁨을 노래로, 노조집회에서 분노를 노래로, 세월호 참사현장에서 슬픔을 노래로, 희노애락의 모든 현장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그들이 분노, 슬픔, 기쁨을 노래한다면, 우리는 여호와를 노래한다.

portrait2011신원섭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M.Div를 Th.M., Liberty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in Lynchburg VA, U.S.A. (Pastoral Leadership)를 수학하였으며 2003년 대전선한교회를 설립하여 목회하였으며 2012년에는 세종시선한교회를 설립하여 건강한교회세우기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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