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호] 정욕의 추구는 자신을 병들게 한다 –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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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갔다가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의 궁을 보여준다는 말을 듣고 그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헨리 8세는 수많은 화젯거리를 남긴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천 년 동안 유럽 최고의 뉴스 메이커라고도 한다. 역사가들은 화제가 없으면 심심해하니 헨리 8세는 너무나 좋은 안줏거리가 되는 셈이다. 셰익스피어는 그에 대한 희곡을 썼고, 도니체티는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영화나 연극의 주제로도 다양하게 다루는 등, 사람들에게 헨리 8세는 언제나 흥미의 대상이다. 우리나라의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말이다.

한 예로 로마제국을 가장 큰 영토로 확장했던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는 가십거리를 만들 만한 위대한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면을 도무지 찾아낼 수 없어 역사가들에게는 심심한 대상이다. 굳이 그에게서 약점을 찾는다면 기독교를 일시적으로 핍박했다는 것이다. 그가 치세하던 때에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 35~98)가 순교한 바 있다. 반대로 헨리 8세의 경우 여섯 번씩이나 결혼한 왕으로, 두 명의 왕비를 죽이고 세 명의 왕비를 쫓아냈으며 한 명의 왕비는 자연사했다. 또한, 뛰어난 시종들이나 자신의 행동에 반대하는 자들은 가리지 않고 죽였다.

이제 그에 관한 얘기를 풀어가 보도록 하겠다. 헨리 8세는 본 부인인 캐서린에게 싫증이 났다. 딸 하나만을 낳았을 뿐 그가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지 못했고, 이미 그녀의 나이가 마흔을 넘 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내 캐서린은 그의 형수였다. 형 아서 튜더(Arthur Tudor)가 11살에 요절하는 바람에 앙리는 왕세자가 되었고 아버지는 당시 강력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칼 5세(Charles V, 1500~1558)와의 관계 유지를 원했기 때문에(캐서린은 칼 5세의 친족이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가 형수인 캐서린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헨리 8세의 햄프턴 왕궁)

그는 결혼 20년 만에 양심의 가책을 이유로 이혼을 결심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가면무도회에서 만난 캐서린의 궁중 말동무, 앤 불린(Anne Boleyn)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미 언니 메리 불린을 임신시킨 전력이 있는 왕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헨리 8세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왕비의 권리를 누리고 싶어 했다. 어쩌면 조선 시대의 장희빈과 비슷한 정치적 야망을 품었던 것 같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의 결혼 허락을 구하러 교황청에 비서를 보냈다. 그는 이혼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캐서린과의 결혼이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첨부했다. 즉, 아내는 그의 형수로 성경 레 20:21절의 ‘형수와 결혼을 금한다’는 말씀에 어긋난다는 사실과 캐서린이 이미 처녀성을 상실한 여인이었으므로 아내 될 자격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는 헨리 8세의 이혼을 허락할 수 없었다. 이유는 캐서린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Charles V)의 친족 이모라 눈치를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군대가 1527년 로마를 함락시키고 교황을 생포해 간 적도 있었기에 단순하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국에도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영국이 교황에 대한 충성을 포기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교황은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약이라고 생각해 대표에게 판결을 미루라고 했고, 이 문제를 4년이나 질질 끌게 하였다.

그러는 중에 헨리 8세는 교황청에 반감을 품기 시작했고 새 대법관의 자리에 오른 크롬웰은 1533년에 ‘헨리 8세의 첫 번째 결혼은 무효’라고 법리적 해석을 함으로써 교황청을 분노하게 했다. 결국, 1534년 헨리는 교황과의 결별을 고한 뒤 6세기부터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던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켜 왕인 자신이 국가와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재산들은 경매에 넘겼다. 이에 반항하는 자들은 처형 되었는데, 그중에는 토머스 모어(Thomas More,『유토피아』의 저자)와 주교 존 피셔(John Fisher), 카르투지오회의 수도사들이 포함되었다. 그 후 헨리 8세 치하에서 종교에 도입된 변화로는 교회에서 영어 성경을 사용하게 된 점이 대표적이나, 가톨릭과 결별하는 일로 나라는 어지럽게 되었다.

왕에게는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할까? 1,400년 전 로마에서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부하 중에서 똑똑한 장군을 양아들로 삼아 왕위를 넘겨주었다. 로마는 당시 영국 국토의 몇 배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왕이 된 자들은 모두 뛰어났기에 역사는 그들을 5현제(五賢帝)라고 칭한다. 그들은 ‘네르바’(96~98) ‘트라야누스’(98~117),‘하드리아누스’(117~138),‘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황제들로, 그들로 인해 로마는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헨리 8세는 이런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리 아들에 집착했을까? 아무튼, 아들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은 윤리나 도덕을 무시하게 했고 그는 수많은 정치적 난관을 무릅쓰고서야 앤과 결혼할 수 있었다. 왕비가 된 앤은 자신이 섬겼던 캐서린의 딸 메리를 서출로 만든 후 본격적으로 하대했고, 메리는 살아남기 위해 온전히 굴종할 수밖에없었다. 또한, 메리는그 반발로 후에 여왕 자리에 오르자 독실한 가톨릭교도가 되어 존 낙스(John Knox)와 격렬하게 싸웠고, ‘피의 여왕’이란 칭호를 얻었다. 앤은 헨리 8세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딸 엘리자베스 한 명을 낳는 데 그치고 말았다. 몇 번을 임신했으나 유산했고, 그 유산된 아이들이 남자 아이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안타깝게 하였다. 곧 헨리 8세의 사랑은 시들해졌고 이번에는 그녀와 이혼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게 되었다.‘앤이 오빠와 근친상간을 했고 여러 명의 남자와 관계를 맺었으며, 반역을 도모했다’는 혐의를 씌워 고소한 것이다. 결국, 1536년에 앤은 포박된 채 런던탑에 투옥되었다.

형장은 이미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앤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수행하는 성직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오월이군요. 전에 여기 왔을 때는 나를 위한 축제가 열렸었어요!” “ ……”
“많이 아플까요?”
“저, 프랑스에서 특별히 망나니를 불러왔다고 합니다.”

“하긴 괜찮을 거예요. 나는 목이 가느니까….”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목은 단번에 도끼에 잘려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를 죽인 헨리 8세도, 그녀의 목에 도끼를 내리쳤던 사람도, 그리고 운집했던 수많은 구경꾼과 그녀를 수행했던 성직자도 결국 모두 죽었다. 하나님의 심판인지, 헨리 8세는 마상 경기에서 떨어져 큰 상처를 입은 다리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환부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몸은 매독균으로 인해 온몸이 곪은 종기로 뒤덮였다. 더 나아가 몸집이 지나치게 비대해졌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특별하게 고안한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한 명의 사람을 죽여도 그로 인한 공포감이 평생을 지배한다는데 그 많은 사람을 죽인 헨리 8세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궁에는 방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백 개? 아니 수천 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자신의 침실을 측근도 모르게 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많은 사람을 죽였던 독재자 스탈린이 비서에게조차 자신의 당일 숙소를 비밀에 부쳤다는 것처럼 말이다.

헨리 8세는 1547년 55세의 나이로 죽어가면서, 단말마처럼 “수도사, 수도사”라고 외쳤다고 한다. 자신이 죽인 수도사들의 환영이 그의 마지막 순간에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이전에 가톨릭에 열성을 다하는 성도였다. 그런 공로로 1521년 교황 레오 10세에게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성공회를 만든 후에도 예식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의 성채 같은 궁의 정문 양 기둥에 한쪽에는 네로의 흉상을, 다른 쪽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흉상을 새겨 놓았다. 평소에 그들을 흠모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처럼 해석이 어려운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헨리 8세는 자기 자신을 신실한 신앙인으로 여겼으니 말이다.

한평우 목사
한평우 목사님은 현재 로마 한인 교회 담임목사로 35년째 시무하시고, EMI 유럽 목회자 연구원 창립및 원장, 유럽 Koste 후원회장, 디모데 선교회 회장및 디모데 로마 선교 아카데미 학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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