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호] 인생의 변곡점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폰테 밀비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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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따스한 어느 날, 집사님과 함께 ‘폰테 밀비오’(Ponte Milvio) 다리를 찾았다. 오래전부터 이 부분에 관하여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생각만 하고 막상 실행은 미루고 있었다. 역시 사람이 어떤 일을 계획하기는 쉬워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폰테 밀비오 다리는 기독교 역사의 변곡점이 되는 장소다. 줄자를 가지고 길이를 재어 보았더니, 폭은 7.70m, 길이는 170m가 된다. 170m는 테베레(Tevere) 강의 현재 가로 폭이다. 조국의 크고 아름다운 한강에 비하면 아주 작은 강이다. 안내판에 쓰인 문구를 보니, 현재 다리는 BC 534년에 나무로 다리를 만든 이후 네 번째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되어 있다. 같은 자리에서 2,500년 이라는 장구 한 세월 동안 이 다리는 로마의 수많은 역사의 질곡을 몸으로 껴안고 살아온 셈이다. 이 다리를 통해 왕래한 사람들의 수가 지난 2,500여 년 동안 그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지금도 이 다리는 수많은 사람의 무게를 견디어 내고 있다.

이 다리에 관한 관심이 큰 것은 일찍이 콘스탄틴(Constantinus)과 막센티우스(Maxentius)가 치른 전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의 승리로 콘스탄틴은 AD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선포했고, 기독교가 더는 카타콤의 음습한 지하로 숨을 이유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저 팔레스타인에서 미미하게 출발한 기독교가 로마 대국을 영적으로 점령하게 된 전환점이 된 역사적 출발지다.

그런데 그 전쟁의 개요는 이렇다.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는 현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장군이었다가 황제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빈천한 가정 출신이었으나 군대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여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웠기에 승승장구하게 되었고, 결국 군인들의 추대로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황제가 된 후 공동 황제로 ‘막시미아누스’를 임명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부제(Caesar)를 임명했는데 그중 한 사람은 막시미아누스의 근위대장 콘스탄틴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를 아들로 입양(293.03.01)하여 부제로 임명하고 같은 날 니코메디아에서 또 ‘갈레리우스’를 부제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각각 임무를 부여했다.

● 디오클레티아누스 – 동부 지역

● 막시미아누스 –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지역

● 콘스탄티우스 –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지역

● 갈레리우스 – 도나우 지역

이렇게 네 황제가 전 로마제국을 나누어 통치함으로써 효율적인 통치를 도모하도록 했다. 이런 체제는 얼마 동안 순탄하게 운영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막강한 통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하겠다는 뜻밖의 선언이었다. 아직 기력이 팔팔한 황제가 막강한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것은 로마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1,700 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세계 최고로 뉴스를 몰고 다니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13년 스스로 물러나는 드문 일도 있었지만 말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저 황제가 하기 싫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대통령도 힘들어할망정 물러나는 사람은 없지 않았는가. 그런데 절대권력을 누리던 시절에 황제 스스로 그 막강한 권력을 내려놓고 은퇴를 선언하였으니 분명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아무튼, 그 결과 부제들이 자동으로 공동 황제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콘스탄틴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콘스탄틴은 부하들의 천거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야심가 막센티우스(막시미아누스의 아들)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다가 스스로 황제로 칭하였다. 물론 군부의 지지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는 아버지의 통치 영역인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통치하게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향하여 반기를 든 셈이다. 갈레리우스는 막센티우스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가 임명한 부제 세베루스를 보내 막센티우스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세베루스가 죽임을 당할 정도로 막센티우스의 세력은 막강하였다.

로마는 당시 수도였기에 중요한 거점이었다. 수도를 장악하고 자신이 황제라고 일어선 막센티우스를 그냥 두면 콘스탄틴은 어쩌면 닭 쫓던 개와 같은 신세가 될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휘하의 장병 5만 명과 기병 8천 명을 데리고 급히 로마로 진격했다. 권력은 항상 골육상잔의 피비린내를 풍기게 한다. 일찍이 시저와 폼페이우스도 그랬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오도 그랬다.

콘스탄틴은 5만 병사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여 로마의 북쪽 외곽 도로인 플라미니아(Via Flamina) 길에 진을 쳤다. 그때 로마의 황제 막센티우스는 밀비오(Ponte Milvio) 다리를 배수진으로 삼아 보병 17만 명, 기병 만8천 명의 군사로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러니 군사의 수로 본다면 턱없는 싸움이었다. 현대전처럼 놀라운 병기를 동원하여 싸우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수적 우위는 전쟁의 승리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콘스탄틴은 전쟁 전날 밤에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그리고 가족의 몰살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세계 전쟁사에도 유례가 없다는 6.25 전쟁,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였다고 한다. 중공군 44,000명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오는데 우리는 20,000명으로 그들을 막아야 했다. 350m 정도 되는 작은 고지였는데 이 고지를 열네 번이나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10,000명이 죽고 우리 군도 3,500여 명이 전사했다. 전투로 시체가 산을 이루어 그것을 밟으며 싸워야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식의 참혹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절박한 상황에 콘스탄틴은 두려움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간절한 심정으로 신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군인들은 대부분 ‘미트라 신’을 섬겼으니 그 신께 도움을 요청했는지도 모른다.

“신이시여, 만일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면 나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꿈에서(어떤 책에서는 환상으로 표현하기도 함) “이 깃발을 가지고 정복하라”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기는 바로 ‘크리스투스’(Christus)라는 그리스어 글자(Χριστός)의 문양이었다. 콘스탄틴은 이튿날 자신이 꿈에서 보았던 기를 만들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였고, 그것을 앞세우고 전쟁을 치렀다. 수적 열 세였지만 콘스탄틴은 역전의 용사로 실전에 강했고 휘하의 군대는 이제껏 전방을 지켰던 백전노장 같은 병사들이었다. 상대인 막센티우스(Maxentius)는 주간 전투를 하려고 했으나 점괘가 좋지 않았기에 야간 전투로 바꿨다. 전투를 시작하는 그 날이 바로 자신이 황제에 취임한 날이었기에 행운이 깃들 것으로 믿었다. 그는 중무장 한 누미디아(카르타고) 기병을 주력으로 삼았고, 콘스탄틴은 기동력 이 우수한 골족(현 프랑스) 기병을 주력으로 맞섰다.

전투는 막센티우스가 초반에 선전했으나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에게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밀비오(Ponte Milvio) 다리를 건너가 테베르(Tevere) 강을 앞으로 마주하여 진용을 구축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막센티우스는 휘하 장병들에게 밀비오 다리를 건너가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밀비오 다리가 폭이 7m 밖에 안 되는 다리이며, 18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신속하게 통과하기에는 턱없이 좁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이렇듯 성공과 실패는 순간적인 작은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후퇴하는 자는 마음이 급한 법이다. 중무장한 군인들과 기병들 18만여 명이 한꺼번에 급히 건너기에는 다리의 폭이 너무나 좁았다. 더구나 배후에는 공격해오는 콘스탄틴 군대가 있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급했을까? 그 많은 병사가 한꺼번에 후퇴하면서 아비규환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 먼저 건너려고 밀어붙이게 되었고, 조급하게 밀고 당기는 엄청난 무리의 압력에 의해 다리 난간 은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밀리던 수많은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강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 많은 병사가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지도 못하고 말이다. 폰테 밀비오 다리의 높이는 한강 다리에 육박한다. 황제 막센티우스조차 사람들에 밀려 강으로 빠졌고 허우적거리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막센티우스는 그가 입고 있는 튼튼한 갑옷의 무게 때문에 헤엄쳐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권력욕에 눈먼 지도자 막센티우스를 어떤 부하가 강으로 밀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은 로마 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는 혹독하게 세금을 징수하였고, 몇 년 전에는 폭동이 일어나자 수천 명의 시민을 잔인하게 죽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아내를 탐한다는 소문들이 돌아다녀 로마인들의 신망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한마디로 그는 자격 미달인 황제로 치부되고 있었다. 막센티우스의 목은 잘려서 로마에 효수 되었다가 아버지가 있는 카르타고로 보내졌다. 그의 아들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특히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틴의 아내 파우스타(Pausta)의 친오빠였다. 남편으로 인한 친 오빠의 죽음 앞에서 파우스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권력이란 이처럼 털끝만큼의 동정도 할애하지 않는 잔인한 속성을 가졌다. 권력 때문에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삼복더위에 뒤주 안에 가두어 죽이지 않았던가. 권력의 실체는 이처럼 잔인한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권력에 집착한다.

콘스탄틴은 이 전투에서 깨끗이 승리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어처구니없이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 때문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약속한 대로 313년, 밀라노 칙령을 선포함으로써 기독교를 공인했다. 드디어 기독교는 핍박의 물꼬를 텄던 네로 황제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250여 년간의 치열한 핍박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더는 카타콤의 음습한 지하로 내려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간절하게 소망했던 신앙의 자유를 알리는 팡파르가 전 로마에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신앙의 자유와 함께 기독교는 참된 생명력을 조금씩 잃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테베레 강은 이 모든 역사를 가슴에 품고 유유히 흐르고있다. 강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역사의 의미를 배우라는 듯이 말이다. 흐르는 강물과 함께 수많은 군인의 함성과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다. 이 참혹한 전투로 인해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 해주는 듯이 말이다. 기독교는 이렇게 강물처럼 흘린 피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어왔다. 그런데 이 시대 성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선배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영적 무감각증에 걸려 있다. 신앙의 가치에 대해 둔 감하며 세상의 즐거움에 침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우리는 또 다른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른다.

역사의 변곡점에는 항상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나 세계에 말이다. 변곡점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한평우 목사
한평우 목사님은 현재 로마 한인 교회 담임목사로 35년째 시무하시고, EMI 유럽 목회자 연구원 창립및 원장, 유럽 Koste 후원회장, 디모데 선교회 회장및 디모데 로마 선교 아카데미 학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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