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간 황제 -티베리우스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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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간 황제 -티베리우스 황제

한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전체 삶을 대표한다. 흔히 역사가들은 한참 후에 그 사람의 삶의 이면을 시시콜콜 따지며 평가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역사가들이 볼 수 없는 부분을 하나님께서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짧은 이름 뒤에 숨어있는 한 사람의 삶의 자취들은 차곡차곡 진실이라는 창고에 저장되어 햇빛을 기다리고 있다.

성경은 ‘디베료 황제’로 기록하고 있지만, 역사에서는‘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BC 14~AD 37)로 유명하다. 그는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4년을 더 살다가 79세로 세상을 떠난, 장수한 황제이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 가장 장수한 왕인 영조가 83세까지 살았는데, 티베리우스도 그에 버금가 는 장수를 누렸다. 황제의 몸으로 장수한다는 것은 모든 통치자의 가장 큰 로망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영국의 헨리 8세는 그의 햄프턴 궁 입구 오른편에 티베리우스의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그는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가 예언하였고 온천지가 주목하고 기다렸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바로 그 땅을 다스리던 황제였다. 그리고 그가 세상 사람들의 죄를 한 몸에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에도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황제였다. 아마도 그는 팔레스타인의 총독을 통하여 많은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특히 청년 예수에 관해서 말이다.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저‘이상한 청년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을 미혹하다가 잔혹한 형을 받고 죽었구나.’ 하고 혀를 차며 지나갔을까?

오늘날도 이 지구촌에는 수많은 영적 외침들이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부자처럼(눅 16:19~31) 자신의 영광에만 귀를 기울이며 살아 가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는 BC 42년에 태어났다. 티베리우스의 아버지는 공화정 말기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Augustus, BC 63~AD 14)의 대척점에 있었던 안토니우스에게 충성을 바친 ‘클리엔테스’(clientes)이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자 정처 없이 도망자로 살아가야 했다. 그는 당시 젖먹이였던 디베료를 데리고 시칠리아로 피했다가 그곳도 불안하여 그리스까지 도망을 갔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대(大)사면령이 선포되어 3년 만에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디베료의 어머니 리비아(livia)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얼굴이 희고 눈이 한없이 명징한 미남이어서 그를 바라보는 여인들은 신비함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아내가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인 상황에 디베료의 어머니 리비아에 첫눈에 반해 빠져들고 말았다. 그가 황제의 권력을 이용해 티베리우스의 아버지에게 아내와 이혼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부부는 할 수 없이 헤어져야 했다. 그리고 황제는 임신 중인 아내를 버리고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인 리비아와 결혼했다.

이런 비윤리적 전통이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탈리아의 총리를 세 번씩이나 역임한 베를루스코니 (Berlusconi)는 총리직에 있으면서 아내가 있는 몸으로 젊은 여인들 과 음탕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비록 후에 이혼했지만, 일흔 살이 넘은 사람이 이탈리아를 지금도 고대 로마국가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내와 행복하게 살던 리비아의 남편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하루아침에 권력의 힘으로 가정이 깨어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는 이혼당한 후 어느 날 시내에서 우연히 아내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황제의 부인이 되었으니 그녀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는 사랑했던 부인을 보고는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까지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는데 어느 간사한 자가 이 소식까지 황제에게 전해주는 바람에, 황제가 차후에는 절대로 보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예부터 이 세상에는 이렇게 힘이 없는 자가 아내나 재산을 억울하게 빼앗기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와 함께 있던 티베리우스는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에게 보내져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후계자가 되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황제의 후계자로 우선순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는 바람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군사령관으로 지도력을 보이기도 했던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로 입양되어 황제의 후임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딸 율리아와 결혼도 하고 말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말년에는 거의 나폴리만에 있는 카프리 (Capri) 섬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티베리우스가 대신 통치를 할 정도였다. 결국, AD 14년에 탁월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자 원숙한 56세 나이의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2대 황제로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 탄생부터 죽으실 때까지, 아니 성령의 강림으로 초대교회가 눈부신 부흥을 이루는 과정을 빠짐없이 보고받는 기독교사에서 특별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서해안 스페르롱가(Sperlonga) 해안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 의 별장을 지었다. 그 별장은 바닷물을 끌어들여 고기들을 가두어 두도록 설계되었고, 바닷가의 천연동굴과 연결되게 만들었다. 싱싱한 바다 생선을 먹으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후에 모래가 올라 오고, 또 싫증이 났던지 장인이 거주했던 카프리 섬으로 이전하였다. 그는 재위 26년부터 37년(사망)까지 카프리 섬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공포 어린 고발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 많은 사람이 오금을 펴지 못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역사가는 그를 강한 로마의 초석을 놓았던 현명한 왕으로 기술한다. 하나님의 평가는 전혀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나의 이름 석 자, 그에 합당한 삶을 위해 우리는 고민해야 하겠다. 생명책의 이름 석 자 밑에 기록될 나의 진솔한 삶의 기록을 위해서 말이다.

당신은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평우 목사
한평우 목사님은 현재 로마 한인 교회 담임목사로 35년째 시무하시고, EMI 유럽 목회자 연구원 창립및 원장, 유럽 Koste 후원회장, 디모데 선교회 회장및 디모데 로마 선교 아카데미 학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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