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호] 분에 넘치면 망한다 -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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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 카시아(Via Cassia)

로마 시내에서 북쪽으로 뻗은, BC 300년경에 닦인 비아 카시아 (Via Cassia, 고대 카시아 가도)라는 길이 있다. 그 길가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기행을 일삼아 역사가들에게 자주 안줏거리를 제공하는 ‘네로(Nero Claudius, 37.12.13~68.06.09) 황제’의 무덤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 근처에서 발굴되었고, 지금은 길가에 2~3m 높이의 축대를 쌓고 그의 석관을 올려놓아 지나가는 길손들이 볼 수 있게 해놓았다. 그래서 이곳의 명칭이‘네로의 무덤 길’(Via Tomba di Nerone) 이다.

네로의 무덤인 석관이 지금껏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하다. 수많은 황제의 무덤이 대부분 유실되었는데, 콘스탄틴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기독교가 흥왕한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을 크 게 핍박했던 그의 무덤이 2천 년 가까이 보존되었다니 말이다.‘이 무덤에 대해 한번 글을 써봐야지.’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로마를 방문한 후배와 함께 이곳을 찾게 된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밀비오(Milvio) 다리와 기독교인을 몹시 핍박했던 네로의 무덤은 꼭 보아야 한다고 내가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를 방문하는 기독교인들조차 대부분 이런 곳에 별 관심이 없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네로의 석관은 장식이 전혀 없는 투박한 모습이어서 눈에 띄지 않는 편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는 신하들에게 가볍게 보이는 행동이나 , 무시당할 수 있는 짓 을 해서는 안된다 ”고 했는데 , 네로는 그런 일을 다반사로 했다. 연극에 광대로 출연하기도 했고 심지어 그리스에서 개최하는 성악 콩쿠르에 참석하느라 일 년 동안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그런데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피가 흐르는 혈족이었기 때문이리라(그의 어머니 소 (小)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증손녀임). 그것이 백성들이 네로 를 용납하게 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로마인들이 가장 흠모 하는 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혈족이라는 사실) 명문대 출신인 사람 또는 미녀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쉽게 정상참작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흔히 ‘똑똑한 사람인데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정황이 있었겠지’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 않는가.

그의 석관을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유서 깊은 길가에 놓아둔 것은, 오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교훈을 주려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벌써 없애버렸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 면이, 오랜 역사를 지탱하고 있는 로마의 남다른 점은 아닐까 생각 한다. 독재자 무솔리니가 세운 기념탑도 현재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 다 . 아 마 후 손 들 이 그런 모습 을 보면서‘ 나 는 저런길을 걷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키아벨리가 인간의 선함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인간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인도의 간디에게 복잡한 여성 문제가 있다 는 보도를 통해 인간의 부패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를 존경했던 네루(Jawaharlal Nehru, 후에 인도의 수상)조차도 간디에 관 해 이 부분은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은 대체로 장점만을 부각하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어두운 면을 볼 때 절망하곤 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삶의 내용에 누구든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그래서 윤리나 도덕적인 면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64년 7월 19~20일에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7월 중순은 로마의 더위가 맹렬한 때다. 그런데 더위와 함께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게 되었다. 그 결과 로마의 14개 구역 중에서 열 곳이 전소할 정도로 굉장한 화재였다. 화재 소식을 듣고 네로는 별장이 있는 안지움(Anzium)에서 달려와 화재를 진압 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화재였기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민심은 달랐다. 당시 네로는 자신의 궁 아우레아(Aurea)를 현 콜로세움 가까이에 건축하고 있었다. 그는 궁터를 확장하려는 야망 으로, 가난한 시민들의 불탄 집터를 값싸게 매입해오고 있었다. 그런 네로의 행동은 일부러 방화를 저질렀다는 시민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골족을 다스리던 사령관이 반란을 도모하기까지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상황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을 보며 네로는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도들에게 전가하는 일이었다. 그는 결국 방화의 혐의를 씌워 당시의 기독교 지도자였던 바울과 베드로를 죽였다. 그러나 사태는 그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네로는 서기 68년 6월 8일, 원로원에서 ‘국가의 적’으로 가결되어 하루아침에 왕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쫓겨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기에 그는 새벽에 그를 돕는 황궁의 재무 담당 파오의 뒤를 따라 정신없이 노멘타나 길(Via Nomentana)로 도망쳐야 했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가린 채 파오의 별장으로 숨어들었으나 숨 쉴 사이도 없이 그를 잡으러 달려오는, 원로원 에서 보낸 병사의 말발굽 소리를 들어야 했다. 겁에 질려 있던 그는 시종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자신을 향해 칼날을 겨눌 수 있었다. 그 순간에 토한 마지막 말을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는 로마사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오, 제우스 신이여, 이토록 훌륭한 예술가가 죽게 되다니요.”

그런데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면서 흐느끼는 여인이 있었다. 그를 사랑했지만 다가갈 수 없었던 그리스 출신의 노예, 클라우디아 악테였다. 한창 젊은 31세의 나이로 죽어가는 네로를 지켜보며 그 곁에서 슬피 울어주던 여인. 그 깊은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네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인간은 죽음의 직전에 이르러서야 비로 소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연약한 존재인가 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얼마나 나를 돌아보며 살아가고 있을까?

한평우 목사
한평우 목사님은 현재 로마 한인 교회 담임목사로 35년째 시무하시고, EMI 유럽 목회자 연구원 창립및 원장, 유럽 Koste 후원회장, 디모데 선교회 회장및 디모데 로마 선교 아카데미 학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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