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호] 04 전도사의 길, 화가의 길 –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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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 목적을 가지게 될 때는 호기심이 크게 작용한다. 남프랑스의 ‘프로방스’를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그곳은 평소 좋아하는 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그의 삶의 한 조각을 구체적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특히 생 레미(S. Remy)는 작고 예쁜 도시로 1889년에 반 고흐가 발작을 일으켜 1년 동안 입원한 병원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바뀌었을 뿐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그 당시는 병원 시설이 열악했는지, 입원했던 환자를 다룬 기사를 보니 환자의 양팔과 두 발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기둥에 묶은 사진이 남아있다. 그 시절에는 정신질환으로 주변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환자를 다른 방법으로 다루기 힘들었을 것이다.

병원의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작은 방에 고흐가 사용하던 개인용 침대가 쓸쓸하게 맞이한다.

침대 곁에는 허름하고 작은 사물함이 놓여 있는데, 이곳이 바로 불운했던 화가 반 고흐가 머물던 방이라고 한다. 이 방에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해바라기>나, <사이프러스 나무>, <레미 병원>, <시에스타> 등 많은 작품을 마무리했을 터!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말이다. 사람은 종종 환경 탓을 하지만, 사람은 아무리 열악한 상황에서도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사람의 위대한 점이리라.

프로방스는 목가적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기에 이런 그림들이 태동하였나 보다. 그가 그린 그림의 배경을 따라 인쇄된 그림을 현장에 전시해 놓았는데, 배경이 된 야트막한 산, 그리고 감람나무가 늘어선 밭,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길 등이 지금도 백 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듯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했던 고흐가 없다는 것뿐. 사람은 타인의 인정을 먹고 사는 존재다.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어지고, 결국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다. 화가에게 있어 자신의 그림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지방은 건축법을 까다롭게 규제하고 있어서 집들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같은 여행객이 고흐가 살았던 시대를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으니 다행스럽기만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화가 반 고흐를 좋아한다. 이유는, 그가 가난한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 자신도 전도사로 탄광촌에서 일정 기간 사역했었기에 동질의식과 함께 연민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그를 만난다면, “목회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신지요?”라고 인사할 것 같다. 그는 폭포수 같은 열정의 소유자였기에 그 정열로 목회도 잘했을 것이라고, 그를 이해하는 분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는 탄광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하다 냉대를 당하고 그 일을 접어야 했다. 그러던 차에 그는 ‘그림’에 대한 열망을 느끼게 되었고, 그림을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돈이 없어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어가야 했기에 늘 외톨이였고 그로 인한 무시와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예술가가 자신의 제자만을 인정하고 돌보려 하기 때문이다.

피카소처럼 생전에 유명세로 명성과 부를 누렸던 사람도 있지만, 반 고흐는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그를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를 후원한 오직 한 사람, 동생 ‘테오’만이 형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을 뿐이다. 동생 테오는 파리의 화방에서 일하면서 월급을 받는 대로 형에게 보냈다. 동생은 변함없이 형을 격려했고,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형에게 항상 용기를 주었다. 테오야말로 그림이 팔리지 않아 수없이 좌절하는 고흐에게,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동생이 매월 보내주는 돈은 고흐를 죄책감으로 피 말리게 했다. 동생이 아내와 아이가 있는 상황에서 보내주는 피 같은 돈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조카에게 송금하면서 ‘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어떻게 아껴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한 편지가 남아있다. 하지만 테오는 형에게 송금하면서 그런 지적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형이기에, 또 형이 그림을 포기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을 아는 고흐는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는 미안해서였는지 모르겠으나 “너는 나보다 재능이 많으니 화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동생 테오를 간곡하게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두 사람 모두 가난한 화가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흐가 평생 그린 그림은 수백 점인데 팔린 것은 고작 데생 한 점뿐이었다. 고흐는 커피를 마시고 커피값을 내는 대신 스케치를 해주기도 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에게 감사의 표시로 그림을 선물했다. 의사는 고흐로부터 받은 그림을 잠시 다락방에 보관했다가 닭장의 여닫이문으로 사용했다. 또한, 그가 입원했던 생 레미의 정신병원 의사들이 고흐가 그곳을 떠나며 남긴 그림 몇 점을 사격 연습용 과녁으로 사용했다는 글을 읽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온전한 정신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고흐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하여 동생의 권유로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린 ‘오베르 성당’이 있고, 성당을 왼편으로 끼고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면 고흐가 마지막으로 그린 ‘까마귀 나는 밀밭’이 지금도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고흐가 자살한 곳이라 그런지 지금도 음습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만 같다.

거기서 내려와 그가 마지막 7개월을 살았던 작은 다락방에 들어가 보았다. 키가 큰 사람은 머리가 닿을 정도로 천장이 낮고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음습한 방이었다. 돈이 없었던 그가 가장 싼 방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이 방에 기거하던 중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그의 죽음은 작은 시골 마을을 깜짝 놀라게 했을 것이다. 성당에서는 그가 자살했다는 이유로 장례를 거부했기에 가세 박사의 주선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가 죽은 지 6개월 후, 누구보다 그를 이해하고 용기를 주었던 동생 테오도 죽었다. 형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희망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테오의 아내는 죽은 남편이 고흐의 곁에 묻힐 수 있게 배려했다. 그래서 이름 없는 이 마을의 작은 공동묘지에 형제는 의좋게 나란히 묻혀 있다. 묘지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민낯으로 행인을 맞이한다.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해서, 그가 죽고 나자 비로소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1990년 5월 15일에 크리스티 경매에서 <가세 박사의 초상>이 무려 8,250만 달러에 한 일본인에게 팔렸다. 그 그림이 고흐 생전에 단돈 100달러에라도 팔렸더라면, 그는 허기진 배를 쓸어내리며 오베르의 밀밭으로 찾아가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마 그는 세상의 몰이해를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리라. 살아있을 때 그의 천재성이 조금만 인정받았더라면 그는 37살의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만약 더 살았더라면 그의 그림은 놀라운 깊이를 더해갔을 것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역작들이 수없이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만약’이라는 단어가 입속에서 자꾸 맴돈다. 그의 충만한 열정이 온통 하나님께로 향하는 듯 고흐의 그림 속 사이프러스 나무도 모두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그의 간절한 신앙의 열정을 하나님께로 드리듯. 그는 겨우 10년 동안 그린 그림으로 100년이 지난 지금껏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는데, 그보다 세 배도 더 되는 삼십몇 년의 외길을 고집하는 나는 남길 만한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오래 산다는 것이 이처럼 무의미하게 여겨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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