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호] 왜 신학교는 음악과 예배를 함께 가르쳐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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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없는 열심은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너무 서둘러도 발을 헛디딘다.

(잠언 19:2)

오늘날 신학교는 현재 지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배개혁에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개혁의 지도력은 신학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풀뿌리인 다수의 지역 목회자들과 음악인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잭 헤이포드(Jack W. Hayford)는 이 갱신의 진위를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나는 진행 중에 있는 예배개혁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이미 시작됐으며, 우리가 단순히 일시적인 유행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히 많은 상황에서 그 열매가 시험되었고 가치가 증명되었습니다 (Worship His Majesty, 21).

   신학교로부터의 이 지도력 결핍은 목회자들과 음악인들의 효율성에 헤아릴 수 없는 해를 계속 끼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변적이며 부차적인 요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역교회의 예배에 가장 중요한 중심 장애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배에서 앞으로 전진하려면 목회자들과 음악인들과 신학교들이 강력한 동반자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지난 수십 년간 거의 모든 미국의 신학대학에서 예배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증거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1985년에 실시된 150명의 중서부 목회자들에 대한 연구조사는 겨우 3%가 그들의 신학교에서의 예배 경험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는 내용을 보여 주었습니다 (Norman W. Regier, “Self-Evaluation of Pastor’s Church Music Education…”, 26). 1978에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는 103곳의 신학교 중에서 8개의 신학교 만이 교회음악 학위를 제공했습니다 (Leaver and Litton, Duty and Delight, 93). 1983년의 볼게무트(Wohlgemuth)보고서는 교회음악 학위를 제공하는 신학협회에서, 균일하고 통일되지 않은 표준교육과정과 실제로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도 없이 2년 또는 3년마다 반복될 수 있는 임시 학기만의 강좌가 등장하는 흐린 전망을 내 놓았습니다 ( Leaver and Litton, Duty and Delight, 91-92). 

   J. W. 슈바르츠는 신학교 학생들이 교회음악의 훈련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러한 훈련을 더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J.W. Schwarz, “The State of Church Music Education…”, 65).

현장의 목회자들 역시 예배훈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J. F. 화이트는 신학교의 음악과 예배는 20년 전 즈음의 목회자 양육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늘 날 목회자 양육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언젠가는 예배를가르치지 않는 것도 생각 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음악을 가르치는 몇 않되는 신학교에서 조차 음악과 예배 프로그램이 흔히 통합되지 않고 있습니다. 유망한 목회자들과 교회 음악인들이 물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크게 나뉘어지다

   유능한 성직자들이 별로 충분한 예배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또한 음악인들과 목회자들이 서로 분리 되었습니다. 졸업 후 전문 교회 음악인이 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신학교로부터 일반 목회자와 다른 장소에서 다른 교육을 받습니다.

   음악인들은 음악예술학교나 단과대학 혹은 일반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반면, 목회자와 교회 교육자들은 신학교(seminary)와 일반대학의 신학대학 (school of theology)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음악인들은 신학생들과 다른 언어를 씁니다, 그리고 두개의 다른 언어는 서로 대단히 기술적이고 위협적일 수 있습니다. 음악인들은 신학생들과 전혀 접촉을 경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신학이나 목회 차원의 사역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 두 구룹은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실습 과정에서 함께 어께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특권의 필수과목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음악인들과 예술가들은 대부분의 신학교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기술과 재능이 모범적인 예배에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 결과, 신학교들은 그들의 학교 예배당에서 무기력한 예배의 표현을 겪을 뿐만 아니라 영적 형성의 기회를 놓치는경험을 하기 쉽습니다.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입니까! 적어도, 신학교들은 지역사회의 교회음악인들을 부가적으로라도 활용하여 그들의 채플시간을 돕고 수업시간에 공동강의를 하도록 숙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편에서 보면, 신학적으로 순진난만한 음악인들은 신학적 토대가 비참하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브루스 리프블래드 (Bruce Leafblad)는 음악인들이 교회의 본성과 업무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데 한계가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Bruce Leaflad, “What sound Church Music?” Christianity Today, May 19, 1978, 20). 이런 상황이니,  음악인들과 목사들이 함께 목회지에 던져졌을 때 이해와 신뢰의 결여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새로운 예배가 음악적 표현에 확대된 역활을 부여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위튼 칼리지의 로버트 웨버는 신학교에서의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제 경험에서 말씀드리는데, 저는 세개의 신학교를 예배과목 없이 졸업했습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려는계획을 하고 있었는데도 아무도 저를 앉혀 놓고 “이봐, 예배는 자네의 미래의 목회에 가장 중심적인 측면 중 하나야. 자네가 그 주제에 대해서 모든 걸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고, 스스로 예배자가 되어서 자네의 미래의 회중에게 원숙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세” 라며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순한 사실은 저의 신학교 교수들도 그 주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필요한 것은……예배를 다른 교육훈련 분야들 가운데 하나의 정당한 교육훈련 분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분야입니다. 진실로 그것은 성경적, 역사적, 조직신학뿐만 아니라 예술과, 실무적인 전문 지식, 그리고 신상 정보에 있어서 모두 전문 지식과 기술을 요구하는 복합적 연구 (학제간 연구) 입니다 (Robert Webber, “An Evangelical and Catholic Methodology”, John Knox Press, 1985).

어떠한 대책이 강구될 수있을까요? 누군가 신학교에서 예배에 대한 강좌를 기부하겠다면 그것은 매우 긍적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돈이 절감되는일을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정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관계 동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목회자들로부터의 일치되고 결연한 압력이 또한 필요합니다. 신학교의 지도자들은 목회자들에게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목회자들이여, 만약 지금 상태가 당신들의 영혼을 괴롭힌다면, 편지를 쓰고 전화를 거십시오! 과거에 목회학과 상담학과 기독교교육학이 이렇게 하여 신학교에서 제 자리를 찿은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우려의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 환영일 것입니다!

   Martin E. Marty와 Paul Westermeyer에 의해 관찰된 바와 같이, 현재의 상황은 불화와 분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잠재적 갈등은 명백합니다. 성직자는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음악인은 연주하도록 훈련됩니다. 목사는 거의 예배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음악인은 거의 신학적 훈련과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목사는 예배 전체를 모두 설교와 목양 혹은 전도에 관련되는 것으로 봅니다. 음악인들은 예배를 모두 세속적 사고방식의 예술에 관련된 것으로 보거나 , 혹은 더 높은 수준의 취미를 가르치는 데 연관된 것으로, 혹은 연주에 결부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미국교회가 예배의 정신 분열 상태를 겪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들 모두가 교회 음악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저는 미국 올갠 협회의 지역 및 전국 회의와 교회음악 전문가 워크샵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저는 성직자에 대한 반감 혹은 적어도 그들에 대한 깊은 분노와 원한이라고 불려져야 할 것들에 대해서 제가 말한 것 만큼이나 많은 표현을 그들에게서 듣고 놀랐습니다 (Westermeyer, The Church Musician, 82, xi).

   이러한 원망과 좌절의 일부는 무엇입니까? 음악인들은 다음에 대해서 신학교와 목회자들을 원망합니다

  • 예배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 예배에 관해 설교하지 않는다
  • 그것에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 사람들에게 적극적 역활을 부여하지 않는다

   음악인들은 지도자들이 다음과 같을 때 괴로워 합니다

  • 길고 방해되는 알림이나 광고로 흐름을 끊는다
  • 음악과 메시지의 통합이 일어날 수 있는 설교의 주안점들을 미리 알려 주지 않는다

   음악인들은 소요시간 (lead time)이 필요합니다! 특히 주제적 예배를 인도하는 분들에게 더 그렇습니다. 음악인들이 더욱 불안해 하는 것은 목회자들이 예배의 준비와 교육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결정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은 점점 더 많은 음악인들이 스스로 목회자가 되기 위한 추가적인 훈련을 받는 일을 초래하였습니다!

신학교들이 예배와 음악을

가르쳐야 하는 열가지 이유

  1. 예배는 모든 목회자의 사역의 중심이다.
  2. 음악은 복음주의 예배의 중심이며, 새로운 예배는 이 중심성을 강화하였다:음악이 예배의 50 퍼센트를 형성한다.
  3. 목사와 음악인 사이의 동등관계가 현대 예배에서 요구된다.
  4. 예배는 복합적 학제간의 연구를 요구한다. 학문 기관으로서의 신학교는 예배교육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자원을 가장 잘 제공할 수 있다.
  5. 예배는 영적 형성을 돕는다.
  6. 목회자들은 예배와 음악 신학과 예술에 대한 더 나은 이해가 필요하다.
  7. 음악인들은 신학적 기초 교육과 교회의 사역과 속성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8. 목사들과 음악인들은 수업과 실습을 공유하고 동역사역 이전에 서로 편한함이 느껴져야  한다.
  9.  목사들은 신학교에서 다수의 다채롭고 탁월한 예배의 경험을 하며 또한 예배 기획과 실행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10. 어떤 목회자들과 음악인들은 말씀과 음악에 모두 은사를 갖고 있다. 왜 한 쪽만 개발되어야 하나?  

   음악과 예배는신학교 커리큘럼에서 정식적인 인정을받아야 마땅합니다. 음악목사님들이여,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태도로 행동하십시오! 최소 한도로, (1) 예배 과목을 요구하십시오 그리고 (2) 교수들과  학생들로 구성된 성가대와 혹은워십팀의 창단을 호소하십시오. 시간을 내십시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신학교와 접촉하십시오. 제대로 이해한다면, 예배는 모든 삶에 관련됩니다. 도날드 허스타드 (Donald P. Hustad) 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신령과 진리로 총체적이며 진정한 예배를 경험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일을 걱정하고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분을 예배함의 의미와 즐거움을 배울 때까지는…. 예배자는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영원한 속성(quality)을 갖고 일할 수 있습니다 (A.W.Tozer, Whatever Happened to Worship? Christian Publications, 1985, 12).

                                                                                                                                                       From The New Worship by Barry Liesch

김영국 목사
김영국 목사님
대광고와 한양대학을 졸업하고 1974년 미국으로 이주 Hope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신학과 음악목회를 전공하였고 척 스윈돌 목사와 그의 음악목사인 하워드 스티븐슨의 영향을 받았으며 27년동안 남가주 오렌지 카운티의 큰빛한인교회서 사역했다. 지금은 음악목회연구원을 통해 그 사역을 더욱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저서로는 ‘성공적인 예배를 위한 음악목회 프로그램’ ‘성공적인 예배를 위한 찬양과 경배’(한국장로교출판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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