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호]찬양을 입에 둔 자를 보고 두려워함 2

0
92

인간의 무관심은 하나님의 통제할 수 없는 아가페의 사랑이 부담스럽다. 사랑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느끼고 있지 않은데 상대가 사랑하자고 하면 부담이 된다. 그의 사랑이 나의 존재의 무게를 넘어설 때 인간은 자기의 가벼운 무게를 의식한다. 이것이 선악과의 결과다.
모든 자살 사건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복수다. 무한한 사랑이 자신에게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행위다. 물론 그 본능 속에는 그 무한한 사랑이 부족하다고 여기려 하는 자신의 무지와 이기심에서 헤어 나오지못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경우 큰 상처를 받으신다.
여기 모든 존재의 교감들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좋은 것은 항상 좋은 것으로만 있어서, 그렇지 않은 인간들의 대적 행위들은 자기 안에서만 적대질을 한다. 문을 열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니 그렇다. 언젠가 우연히 이 사랑이 들어왔을 때(받아들였을 때) 준비되지 않은 자기 속에 갇혀 산 인간은 매우 부담이 된다. 이 부담이 사랑의 무한함으로 인해 극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 두렵다. 대적할 수 없는 경지다. 물론 그 사랑은 대단히 친절하고 희생적이어서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며 이보다 숭고한 사랑을 찾을 수 없다. 무관심의 인간과 숭고한 사랑이 충돌할 때 무관심의 인간이 숭고한 사랑을 끝내 접촉하게 될 때 일어나는 이 첫 느낌이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영이다. 두근거림이요 숭경함이자 놀라움으로 전해지는 어떤 것이다.
때로 부담이 되는 것, 하지만 그 사랑의 크기가 나의 존재의 무게를 넘어서는 엄청난 것일 때 오는 감격은 부담과 같은 경지의 낯섦이다. 이 낯섦이 지닌 영이 하나님과 접촉에서 나타난다.

어린 시절 첫사랑을 치를 때 도저히 조절이 안 되는 인자가 날것이다. 통제할 수 없이 놀랍고 새로운 무엇이다. 더구나 생소한 감정에서 일어난 어떤 강렬함에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닌 것, 우리 생명을 가진 자들에게 있는 어떤 인자가 튀어나와 처음 것들이 치르는 사건에만 존재한다. 첫사랑은 그렇게 한 사건에만 일어난 것이요 이게 날것의 영이다. 여기에 노출된 자가 느끼는‘ 새’것이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구하시고 끌어올리시며 견고하게 하셨을 때 그때 벌어진 그렇게 위대한 주의 힘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사람들은 그때 신뢰와 사랑을 거저 가지고 두려움을 느꼈다.

주님께서 나의 입에 새 노래를, 우리 하나님께 드릴 찬송을 담아 주셨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네
(시 40:3, 새번역)

위의 본문을 새번역으로 보니, 내 입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온 후 내가 부르는 새 노래를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실체를 feeling으로 느낀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평소에 느끼지 못한다. 낯선 것이다. 큰 자가 작은 자에게 찾아왔을 때만 느끼는 것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시 33:3)

여기 그 하나님을 느낀 자가 이 낯선 느낌을 가지고 첫사랑에서 일어날 만한 통제할 수 없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새 노래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 14:2-3)

계시록의 저자는 이 소리를 처음 들었다는 것이다. 그 노래는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정말 완전히 다른 노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약 정말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가시적이고 가청범위를 훨씬 벗어난 존재가 아니신가? 날것이 아닌가? 우리가 그 경지에서 날것의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 섰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 구도자의 모습이어야 한다. 두려움 없이 그 앞에 서는 것은 무관심의 노래일 뿐이다. 날것이 서는 것, 새로움 없이 서는 것, 설렘 없이 서는 것, 두근거림 없이 서는 것은 그 대상을 모를 때 일어난다. 그저 음악행위일 뿐이다. 자신의 것만 나온다. 지휘자가 가지고 있는 형질적인 것, 그의 외모, 노래 실력, 지휘 실력, 사람에게 미치는 자기 실력 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만 지휘하고 노래하기 때문에 찬양대원들은 그 지휘자 이상을 상상하거나 놀라움과 날것으로 노래하지 못하고 만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계 5:5-13)

계시록은 종말에 나타날 것들에 대한 요한의 영적 경험이다. 그가 목격한 네 가지 안에 찬송이 들어가 있다. 찬송과 존귀, 영광과 권능. 이는 찬송이 존귀와 영광과 권능, 이 놀라운 능력이 일어나는 현장에 가장 먼저 호칭된 말이다.
지휘자들이여, 찬양에 임명된 자들이여, 이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여. 그들의 일은 놀라운 능력의 자리이다. 얼마나 두려운 자리인가. 얼마나 놀라운 자리인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날 것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19-21)

우리 안에 새 일을 행하시며 하신 말씀이라며 이제 나타날 것을 예기하신 말이 바로 찬양에 대해서다. 우리 안에 찬양의 인자가 있다는 건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형질을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생영을 주신 것은 찬양받으시기 위해서라 하지 않았는가?

주님,
우리에게 주의 낯섦의 영을 주셔서
우리로 주의 은혜 안에 있음을 통시하게 하옵소서.
지나가는 모든 예식과 예배과정에 하나님의 움직임이
어떻게 내 안에 오고가는지 보게 하옵소서.
그 안에 임하신 나의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나의 하나님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선종 목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BA)
Hope International University. Master Christian Music(MCM)
Korea Presbyterian College of America(MDiv)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America(Thm) 수료
Cantor, Music Pastor
카리타스합창단 음악감독
VKCC 지휘자
성서 번역가

_이메일 : Lk4241@gmail.com
_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sunjong.lee.90

NO COMMEN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