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호]찬양을 입에 둔 자를 보고 두려워함 1

0
8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 40:1-3)

슈바이처 박사의 기숙사
청년 슈바이처는 그의 중고등학교 시절 기숙사에 살았는데 그가 그의 자서전에서 그날의 신비를 이야기하고 있다. 슈바이처 박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김나지움 시절의 체험을 통해 그의 삶이 전환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필자의 기억이 불확실하지 않다면, “나는 그 시절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에서 새벽이 올 때까지 오르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새벽녘에 잠 한숨 자지 않고 레슨을 받으러 10km나 떨어진 곳에 가곤 했다. 그 날은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라틴어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하루의 안식에 즐거운 기분에 사로잡혀 4층 기숙사에 있는 내 침대 앞에 걸터앉으며 잠을 깨웠다. 아침 창을 열었다. 내 창가에는 아침 습윤이 촉촉하게 방으로 가만히 모여 오고 있었다. 창 옆에는 4층까지 뻗은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고 나무 속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는데 곧 그 나무에 햇살이 펼쳐왔다. 바로 그때 온몸을 전율케 하는 억세게 하강하는 천상의 음악이 들려왔다. 나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음악을 들으면서 미래에 대해 꿈을 설계하는 독백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20대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30대부터는 인류를 위해 내 생애를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필자의 조금 오래된 기억이라 위 상황 기억은 첨삭이 되었을 것이다. 슈바이처는 자신과의 약속을 전 생애를 통해 지키고 있는데 그는 음악과 관련한 느낌을 실존과 희생과 맹목적인 것과 불안과 예지와 사려 깊음과 희망과 인인애(隣人愛)와 연결시킨 매우 뛰어난 사상가였고 자연과학자였으며 성서학자였으며 음악이론가였으며 오르간 제작 이론가였는가 하면 뛰어난 오르간 연주가였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아주 우연한 음악성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있다. 그의 음악행위 안에 자신의 영적 자아가 발현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음악은 영적이다. 찬양은 더욱 그렇다. 자신 밖에서 무엇이 온다는 걸 안다. 그래서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무한한 것들에 대해 자신 안으로 가져온 자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통찰에서만 이루어졌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무조건 주셨다. 이 화두는 두려움이다.

두려움
두려움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처음에 일어난 영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난 처음 느낌이다. 두려움이란 생소하고 날것인 것이지, 그것이 상대적으로 두려움이란 뜻이 의미하는 것처럼 느낌이 어둡고 무거운 게 아니다. 이 단어는 생명을 주신 이가 생명을 받은 이와 접촉하는 촉지점에 쓰인 다소 영적인 말이다. 필자는 생명을 창조하신 이의 임재를 현재에 생영으로 반응하는 자의 접촉점에 느끼는 첫 느낌으로 사용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사건 후 스스로 벗은걸 알고 하나님 앞에 두려워한 히브리어 Yare에서 기인한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그저 혼돈과 어둠이 있던 공허한 전 세상의 반대편에 있다. 또한 인간이 죽은 뒤에 있는 죽은 자의 세상의 반대편에 있다. 이 두려움은 오직 생의 전과 생의 후 중간에 있는 현세에서 느끼는 산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영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영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생영을 따로 특별하게 느끼지 않는다. 간혹 생영에 대해 깊이 관찰하는 자들의 생각들과 삶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 생영이라고 굳이 이름 붙이는 것도 종교적 언어처럼 느껴질 만큼 낯설기까지 하다. 생영은 매우 거룩한 것이나 모든 피창조물들에게 있고 또한 생영끼리 다 가지고 있으니 산 자들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고 흔하게 취급한다. 그래서 귀한 것을 모르고 자신이 살아있는 영으로 있음을 잊어버리고 산다.
오래전에 우리가 그 하나님을 누리지 못해 점점 더 산 자들의 게으른 무관심의 결과다. 생영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르고 살다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형상이 녹아 있는 자신 안에 생영이 두려울 만큼 생명으로 살아있음을 알기 시작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그가 주신 생영으로 느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해야 한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생명은 그의 모든 능력을 다사용하여 생명의 전부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현세에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살아있는 우리의 영은 생명을 준 자의 생영과 함께 살아있는 것이다. 이 생영이 가장 그 생명의 전 존재를 누리는 것이 존재를 일으킨 자와 관계하는 것, 즉 찬양하는 것이다. 그 근거는 이렇다.
단지 물질에 불과했던 흑으로 우리의 생명을 주시려 하나님께서 생영을 주셨다 했을 때, 그 영이 히브리말로 ‘르아흐’인데 ‘르아흐’는 구별된, 거룩한 것이다. 여기 거룩하게 구별된 히브리말이 ‘카도쉬’인데 여기 새 노래로 할 때 노래를 수식하는 말이 히브리말로 ‘카데쉬’다. 같은 어원이다. 생영의 거룩함은 새것이고 새 노래도 처음 들어본 거룩한 노래다. 이 생영은 하나님과 관계할 때 언제나 일어난 거룩한 처음 영이다. 살아있는 우리는 이 거룩한 생영을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지금까지 함께 있어왔다. 그래서 생영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하나로 살아왔다. 우리가 느끼는 오감과 거룩함과 예쁜 것을 느끼는 감정과 사랑을 위해 한 영혼을 위해 평생 지고한 마음으로 지켜내는 일까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미 있어 하는 매우 진귀하고 거룩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거룩한 생영이 두려움으로 사람 앞에 보여지는가? 하나님이 주신 생영이 거룩함으로 작동할 때 생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생영을 받고 처음부터 있었던 이 두려움은, 에덴에 있을 때는 사랑과 신뢰의 헤세드가(하나님의 사랑) 작동된 느낌이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과 하나였던 헤세드의 영을 구별시키고 말았다. 선악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동적으로 혜택받았던 헤세드가 자신의 능력 안에서 그 헤세드를 창조해야 하는 단독자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헤세드(사랑)는 야레(두려움)가 된다.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여 하나님 앞에서 숨었다. 하나님과 더 이상 일체가 아니다. 단독자가 되려면 함께 나누었던 일체는 무너지고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과 맞먹어야 하는데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에 비해 너무나 왜소하였다. 그가 이 상황에서 하나님과 견주어 낸 하나님에 대한 첫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을 뜻하는 놀람이나 긴장이나 불안을 뜻하는 것만이 단어의 속내에 있는 게 아니라 ‘유일하고 엄정한 낯선 영’, 날것이라는 뜻이다. 우리 안에 도저히 하나님의 인자를 숨길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헤세드이다. 이 헤세드는 우리가 살아갈 때 생영으로 모든 존재들과 탁월한 교제를 나누는 선물이다. 교감을 나눌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선한 인자를 서로에게 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 선한 인자가 우연하게도 그치게 되기도 하고 의도적으로도 끊기도 한다. 이때 두 관계는 선한 인자가 있었던 자리에 어색한 영이 대신한다. 이 영은 인간 서로 간에 선한 영향력으로 흐르기도 하고 나쁜 영향력으로도 흘러간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좋은 관계에서는 ‘아가페의 사랑’과 ‘놀라운 사랑’이되지만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안 좋은 관계에서는, 하나님은 변화가 없으니 ‘아가페의 사랑’은 그저 있으나 ‘무관심의 사랑’에서 어색함만 두 관계에 있다.

이선종 목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BA)
Hope International University. Master Christian Music(MCM)
Korea Presbyterian College of America(MDiv)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America(Thm) 수료
Cantor, Music Pastor
카리타스합창단 음악감독
VKCC 지휘자
성서 번역가

_이메일 : Lk4241@gmail.com
_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sunjong.lee.90

NO COMMEN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