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호]모두가 좋아하는 곳에는 함정이 있다

0
196

재물과 신앙

평생을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어머니의 강력한 소원은 ‘돈’이었다. 한때 부유한 삶을 맛보다가 전쟁으로 몰락한 가정의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으셨던 신앙의 내용 중에도 물질의 축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으로 본다. 물질은 사람의 기를 살리고 비굴해지지 않게 하는 효험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도 이런 욕망에서 예외는 아니다. 무한경쟁의 논리가 교회에까지 들어왔고 목회자의 마음을 점령하였기 때문이다. 선배들의 간절한 기도와 열심 있는 신앙의 열매로 한국 교회는 비약적으로부흥했다. 세계 기독교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교회가 부흥하니 덩달아 물질이 풍성해졌다. 그래서 온 세계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영력 넘치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목사님은 주일에 교회에 올 때 자동차를 타고 오지 말라는 광고를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상상할 수도 없던 하나님의 축복이다.

교회는 이런 축복을 받았는데 놀라운 것은 성도 간의 사랑과 애틋함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목회자에의 존경, 성도간의 지순한 사랑은 하나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교회는 예전에 비해 놀랍게 부흥을 이루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교회가 풍성해지면 사랑이 증진되고 성도 간에 더욱 친밀해져야 할 텐데 말이다.

가난할 때는 기도의 제목이 물질의 축복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분명 응답을 통해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그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개신교회가 현대 자본주의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거룩한 삶을 도모하는 길이 ‘성직자가 되는 것’이라 여겼으므로 사람들은 거룩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수도사의 길을 갔다. 그런데 성경을 깊이 연구했던 개혁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칼뱅은 잠 22:29절,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아주 중요하게 보았다. 그래서 ‘정직하고 합법적인 방법을 통한 부의 창출’을 선으로 여겼다. 그것은 ‘돈은 악하다’는 이제까지의 등식을 철저하게 부수어 버리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당시 혁명적 발상이었다. 또한, 개혁자들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삶을 권장하였고, 대신 방탕과 게으름 등을 악한 것으로 경계하였다.

이런 사상이 모든 기능인과 상업 종사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됨으로써 놀라운 자본주의가 형성되었다고 베버는 보았다. 그리고 직업의 귀천 또한 사라지게 되었다. 비록 그 직업이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하찮은 것이라고 해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주신 재능을 근면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용하겠다.’라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일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직이라고 칼뱅은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자본은 상상할 수 없는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로 대부분 기술 노동자, 장인,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했다. 그리고 아주 검소한 삶을 지향했다. 이들로 인한 사상의 전염은 유럽을 자본주의의 총아가 되게 했다. 그렇다면 이런 자본의 축척과 신앙은 역사적으로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까? 이 부분을 연구한 막스 베버는 수도원 운동을 그 예로 들고 있다.

서방 수도원 운동의 효시가 된 베네딕트(480~543)는 5세기 말에 로마 근처 수비아코(Subiaco)의 동굴로 진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는 바위 밑에서 3년 동안을 죽기를 각오하고 씨름하던 중 하나님을 만났다. 그러자 제자들이 생겼고, 그들과 더불어 12개의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주변 교회들이 시기하여 529년에 몬테카시노(Monte Casino)로 떠나 자리를 잡게 되었다. 베네딕트는 거기서 수도원의 규범을 세웠고 그 규범은 서방 수도원의 효시가 되었다. 그것은 절대복종, 침묵, 정주(한 수도원에서 죽을 때까지 옮기지 않는 것), 겸손, 기도였다. 그리고 표어가 “기도하고 노동하고 독서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하루 일과는 기도하고 노동하는 것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수도원은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니 노동량도 많아지고, 거기에 따른 농산물의 축적으로 인해 재물은 날로 증대되었다. 거기다가 수도원에 재산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재물이 많아지니, 거룩함을 도모하던 수도원은 자신들도 모르게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수도원을 창설한 베네딕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규범이 지켜졌으나 시간이 갈수록 정신은 해이해졌다. 그래서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은 베네딕트의 수도원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10~11세기 개혁의 기치를 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미 자본의 편리함과 향기로운 맛이 수도사들의 뼛속까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이미 대지주가 되었고, 수도승들은 경작을 위해 노동하며 금욕적이고 청빈한 삶을 살 이유가 없어졌다. 재산을 헌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막대한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히 밭에 나가 농사를 짓기보다는 일꾼을 사서 부리면 그만이었다. 돈은 금고에 충분했다.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가 오히려 고민거리가 되었다. 우리도 경험했듯,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물만 마시면서 드렸던 기도와 맛있고 풍성한 음식을 맘껏 먹으면서 드리는 기도는 영적 질료가 다를 수밖에 없다. 풍요한 가운데 검소한 삶을 지향한다는 것은, 차원 높은 자기 절제와 수준 높은 수도가 요구되는 일이다.

중동의 부유한 여인들은 검은 차도르 속에 비싼 명품 옷을 입는다고 하는데 수도원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 많은 재물로 교회당을 온통 화려하게 장식하기 시작했다. 예복(모자, 겉옷, 신발, 성찬 기구 등)을 찬란한 보석과 값비싼 비단으로 대체했고, 교회당의 벽과 천장을 온통 금으로 덧칠해 변색하지 않도록 도모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니 그에 관한 것은 최고로 꾸며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하나님께서 보신다면, 아니 수도원을 창시한 수도사가 본다면 필시 대경실색할 텐데 물질이 풍성해지니 판단도 흐려지고 말았다. 그들은 성전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여겼다. 또한, 수도원을 창설한 분의 뜻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성 프란시스의 전기에 의하면 프란시스가 살아있을 때 제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든 후 프란시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수도원 운동을 후회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가난할 때는 타는 목마름으로 돈을 구했는데, 물질이 풍성해지자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거기서 헤어나오고 싶지만 이미 돈의 달콤함을 맛보았기 때문에 나올 수 없는 상황은, 앞서 유럽 교회가 겪었고 지금은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실상이다. 돈맛을 거절하지 못함으로써 나타난 현상 가운데 하나가 신앙생활의 변화이다. 간절했던 기도는 수십 년 전에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요한 웨슬리는 처음 받은 월급을 평생 유지했다고 한다. 월급이 올라갈수록 그만큼을 떼어 구제나 선교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평생 성령 충만한 전도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그런 길을 가기에는, 누리는 것이 너무 많아졌다. 천국을 위해 그 많은 부분을 포기하기란 죽기보다 힘든 일일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면 이 시대 영적 회복을 위해 어떤 해결방안이 있을까?

로마의 곳곳에는 기원전에 세워진 디아나 신전(Temple of Diana)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신은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주는 여신으로, 유방이 주렁주렁 달린 형상으로 다산을 상징한다. 그러나 성도는 무릇 풍요의 포로 신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고 교회사 차원에서 볼 때도 성공하기 힘든 일이다. 베버는 자본주의 성공의 예를 미국으로 보고 있지만, 지금 미국은 영적으로 많이 빗나가고 있다. 청교도적인 이상을 구현하는 국가를 꿈꾸었던 지도자들이 사라지고 풍성한 물질이 지배하자, 성경과는 동떨어진 인본주의적 발상과 철학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동성애의 합법화, 성탄절에 당연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의 금지 등 미국 건국의 선배들이 보면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전혀 부끄러움 없이 법제화되고 있다.

우리의 삶은 나그네 여정이다. 잠깐 머물다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숙명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영원한 곳을 도모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풍요의 신’에 미혹을 받아 눈이 가려지고 사상은 혼미해졌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나가야 할까?

유명한 음악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입학하면 미국인들도 잔치를 벌인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줄리아드를 졸업한 사람들 가운데 스타는 만 명에서 십만명 중 겨우 한 명꼴로 탄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타는 어떤 사람일까?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야 스타가 된다고 한다. 물론 공부나 연습은 기본이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교회도 비슷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리더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사를 받았음을 인정하고 섬김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대형 교회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 교회로 인해 문을 닫아야 하는 수많은 작은 교회들이 있다는 것을 뜻하므로 주변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교단과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 일이 지역 사회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런 생각은 개인적으로 성공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왕을 심판하시기 전 꿈을 통해 보여주셨다. 그 꿈을 해석한 다니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도록 권고했는데, 그것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자들을 긍휼히 여기라”는(단 4:27) 처방이었다. 넉넉함을 누리는 교회들이 겸손하게 시행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신앙과 물질, 이 문제는 교회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양립하기 어려운 숙제이다. 잘못 다루면 평생 원수가 되고 잘 다루면 하나님 나라에 큰 영광이 된다. 당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평우 목사님한평우 목사
한평우 목사님은 현재 로마 한인 교회 담임목사로 35년째 시무하시고, EMI 유럽 목회자 연구원 창립및 원장, 유럽 Koste 후원회장, 디모데 선교회 회장및 디모데 로마 선교 아카데미 학장을 맡고 있다.

NO COMMEN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