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호]내 모습 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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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주요 일간지 1면에 성공한 한 사람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아주 예쁘고 전혀 두려울 게 없는 듯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그는 자기 분야에서 험난한 현실과 맞서 싸워 승리를 일궈낸 거인이기에 태도도 보통 사람과는 달라 보였다. 그 기사를 본 이 땅의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하고 또 그의 성공담을 배우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모든 이가 노력하지만 성공한 사람은 아주 적다는 사실이다. 그처럼 성공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므로 성공한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고 또는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절망하거나 비관하기도 한다. 이 땅의 얼마나 많은 인생이 평생, 성공에 목을 매고 살아갈까? 유치원 때부터 시작된 경쟁은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계속되고, 끝내 이기지 못한 이 땅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는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술 문화가 그토록 인기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말이다. 우리는 이처럼 성공에 목말라 하고 또 집착하는데 정작 하나님은 성공에 대하여 어떻게 여기실까? 이 점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말 중요한데 말이다.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한 번도 성공한 사람을 칭찬하신 일이 없다. 세리장 삭개오는 그 시대의 소위 성공한 인생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세청장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만난 주님께서 ‘너는 참으로 대단하구나, 그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애썼구나, 참 장하다’라는 식의 격려를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노예의 자리에서 총독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사람 빌라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도 예외 없이 세상적 가치관에 함몰되어 있다. 그래서 오직 성공을 위해 자녀들을 명문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주일에도 교회학교에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 결과 고등부나 대학부는 텅텅 비어있는 현실이라고 한다. 지난 몇 년 전만 해도 유럽 코스타(KOSTA – 유럽 유학생 수련회)는 참석하는 청년들로 넘쳐나서 장소를 찾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일시에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저렴한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 모이는 수가 겨우 3백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추세라면 5년 이내에 모임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늘의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하늘의 가치관을 붙잡는다고 하나 현실은 세상의 가치관을 좇고 있다. 그 결과 신앙은 삶에서 뒷순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시대 성도들이 신앙보다는 이 땅에서의 성공을 더 간절하게 소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들까지도 만나면 첫인사로 “성도가 얼마나 됩니까?” 또는 “헌금은 얼마나 되는지?”가 화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내놓을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한 사람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상대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승리의식에 도취하고 말이다. 이런 비교의식 때문에 사람들은 자포자기하고 더 나아가 자살로 삶을 마무리하는 일도 생긴다. 그러나 이런 단순 비교는 이 세상이 가져다준 잘못된 사상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늘의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는 우리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아름다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는, ‘어떤 됨’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아름답다고 하신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자는 부유한 대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이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많은 착각을 하고 있다. 성공하고 높아질 때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칭찬하듯이 하나님도 그러실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내 모습 그대로의 나’일 때 기뻐하신다.

지난주에 밀라노에 사는 큰아들이 손녀와 함께 출장차 로마를 방문했다.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면서 날씨는 유난스레 더웠지만, 우리 부부에겐 큰 기쁨의 날들이었다. 그것은 4개월 된 손녀딸의 사랑스러운 몸짓 때문이었다. 손녀딸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받기 위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아직 어려서 할 수도 없고 그냥 웃다 울다 하는 것이 전부였다. 양발과 팔을 움직이고 가끔 환하게 웃는 것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몸짓인데 그 자체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그럴 것이다. 누군가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감동하실까? 또는 밤잠을 자지 않고 사업에 몰두하여 수조 원을 모았다고 하나님께서 놀라실까? 인기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놀라실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노력을 부정하고 지식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 최고로 여기는 세상의 가치관을, 우리는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녀딸처럼 단순히 ‘그 모습 그 대로’ 존재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힘들다고 딴생각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실 때 우리보다 더 힘드셨다. 그 혹독한 고난의 과정을 순종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오르시는 모습이 하나님을 감동케 하셨다. 그러니 열심히 했는데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가난해도, 나사로처럼 온몸에 병이 들어 스스로 가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 자리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견디시라.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상황을 하나님은 고즈넉하게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워 못 견디시겠다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 자리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견디시라.

하나님의 판단을 보자. 이 땅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던 부자가 있고, 그에 비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만 못했던 나사로가 있었다. 부자는 왕이 즐겨 입는 자주 옷을 입었고, 매일 호화로운 잔치로 날을 샜다. 그러나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사로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에 시달려야 했을까? 아마도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 나사로를 측은하게 여겼을 것이다. ‘불쌍하구나, 저러려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 했는데’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 이름의 의미처럼 하나님만을 소망 삼고 힘든 세월을 견뎌냈다. 세월이 흘러 부자도 죽고, 가난하고 병든 나사로도 죽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나사로는 곧바로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고, 부자는 음부에 떨어지고만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 성공한 자일까? 이런 일들이 우리의 지구촌에는 비일비재할 것이다.

오래전에 파리의 모임에 참석하고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한국의 재벌과 머무는 호텔이 같아서 택시에 함께 타게 되었다. 그는 내가 목사임을 알고는 자신에 관해 얘기했다. 실은 자신의 어머니가 교회의 권사님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은 사업으로 바빠 교회에 다니지 못한다는 고백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물질 때문에 신앙을 팔아먹은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제대로 살려면 ‘물질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겠지만 그런 일은 아마 천지개벽이 된다 해도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신은 현재 어떤 상황에 있는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소망하고, 바르고 정직한 삶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해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애용한다는 마포대교 같은 곳은 꿈에도 생각지 말고,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시라. 내 모습 이대로 살아가자.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 사는 삶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한평우 목사님한평우 목사
한평우 목사님은 현재 로마 한인 교회 담임목사로 35년째 시무하시고, EMI 유럽 목회자 연구원 창립및 원장, 유럽 Koste 후원회장, 디모데 선교회 회장및 디모데 로마 선교 아카데미 학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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