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호]입김, 찬양자의 마음 준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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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깨닫고 보니, 사람에게 슬기를 주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영
곧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욥 32:8).

 어릴 때 집에 손님이 오신다고 하면 설레었다. 누구신지 어떻게 생기셨는지 무엇을 가지고 오실지 그리고 그분이 오심으로 우리 꼬마들의 형편이 뭐가 달라지는지 등 오시는 분을 기대하는 마음이 참으로 한없이 궁금하고 두근거렸다. 어릴 때는 매일이 특별할 것이 없이 심심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오늘날 우리 찬양자들은 주일에 무엇을 기대하고 두근거리는가? 위 욥의 고백에 의하면 자신의 전 존재를 있게 하신 존재에 대한 영적 통찰을 함축해서 ‘입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최초의 행위는 입김에서 시작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시작지점은 하나님의 입 그곳에서 나오는 입김에서 시작했다. 입김이라는 말은 생영과 같은 어원에서 왔다. 생영(Breath of Life)은 말 그대로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 것이듯이 살아있는 건 모두 숨을 쉬는 자이고 이는 모두 동일한 생명 행동을 한다. 그가 살아있도록 한 것은 기계적 작동을 하게 하는 원인이 어떤 존재의(영) 신비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생명이 기계장치가 아니듯이 생영은 어떤 유전인자가 아니다.
 생영은 하늘의 신비이다. 생영은 우리를 살아있게 하고 무한한 생각과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원인이다. 살아있음은 또한 큰 힘으로 함께 사는 자들을 격려하기도 한다.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분이 있다. 그가 주신 입김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생명행동하시는 것을 목격하는 우리의 생영의 해우는 참으로 오묘하다. 우리는 그 신비를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믿는 자들이다.

 입김이 있는 행위를 히브리어로, 르아흐라고 한다. 흐는 강하게 발음 한다. 끝에 있는 이 ‘흐’는 후두를 확대하고 아래 배에서(복식호흡) 외치 듯이 크게 ‘크’로 발음해야 할 만큼 강한 후음이 나와 쏟아내듯 터지는 소리이다. 히브리말이 강한 후음과 관련 있는 발음들은 대부분 생명과 거룩함과 전능자의 행위와 관련 있을 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성령(코데쉬)도 그렇다.
 한국 발음으로 ‘입김’을 발표하면 후음에서 된 소리를 내어 쏟아내듯이 ‘이푸-킴’처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특별히 한국인들은 히브리인들이나 서구인들에 비해 말의 선포가 지닌 엄정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말을 쉽게하고 말에 많은 욕이 들어가 있는가 하면 어설픈 농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미국에서 욕을 하며 싸우는 일은 흔하지 않고 이런 싸움은 총을들고 서로를 향해 죽음을 동반한 심각한 사건으로 쉽게 비약한다. 서구인들이 말을 죽고 사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보는 데 비해 한국인들은 말을 쉽게 배설하는 것을 본다.
 조선의 선각자들은 말에 얼이 있다 하여 말을 경히 하는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 묵음과 행실과 생각을 하나로 보았다. 하지만 근세에 들어 실용적인 사상이 들어와 그랬는지 상놈 문화가 양반 문화로 흡수되면서 말이 지닌 실용적 해소용으로 전체 이동하고 오히려 더 많이 발전한 감이 없지 않아 아쉽다.

 일반인들은 호흡에 생영이 있다고 여기지 않기에 입김으로 소리를 입술에서 막고 더 이상 그 생명현상을 터뜨리지 않는다. 찬양자가 생명의 원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긴다면 깊은 호흡으로 터지듯 외쳐야 한다.
 영어로 성우를 보이스 액터(Voice Actor)라고 한다. 소리로 연기한다는 의미이다. 소리를 입에서 낼 때 기능적인 능력을 지닌 기술자들을 뜻한다. 이를 찬양하는 자들에게 적용하면, 찬양하는 자들은 입김에서 나오는 소리를 생영으로 노래할 수 있는 자들이어야 한다. 여기서 소리의 연기적 요소를 뜻하는 기술적인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니라 연기적 요소 안에 어떤 특별한 기운이 있음을 믿고 이를 현재의 긴박한 시공간에서 모든 존재들 앞에 자신이 믿고 경험한 하나님의 기운을 가져와 나타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히브리 사람들은 제사와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생영의 기운이 밖으로 나타나도록 표현했다. 이렇게 하는 자들을 칸토(노래하는 자)라 불렀다. 살아있는 전능하신 존재가 말로 하고 음성으로 할 때 그것이 지닌 파워가 현장에 나타나도록 발음했다. 이는 찬양이 하나님과 동시적인 영적 행위인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이 곧 영인 것은 그 말씀이 살아있어 기운을 펼치기 때문이다. 말씀이 피창조자에게 다가갈 때 행동을 일으킨다. 하나님은 외양적으로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그의 영을 내뱉어 그 창조물을 지으셨던 것처럼 모든 생영들에게 하나님을 흉내 내도록(내면화하도록) 하셨다.

 최근 4월에 한국을 방문하니 일렁이는 잔가지 틈새로 새순들이 돋는다. 필자도 40여 년간 한국에서 살다가 미국 서부로 옮겼는데 여태 모르고 있던 생경한 광경이다. 미 서부는 겨울이 그리 혹독하지 않아 새순들의 거대한 여린 녹색 풍광을 볼 수 없다. 한국에서 이 광경은 내게 큰 충격이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생명 시계가 이토록 동시적으로 하루 이틀 만에 똑같이 발현하다니, 엊그제까지 시꺼먼 죽은 나무처럼 있었다는데 어느새 생명의 살아남(살림)이 온 들녘에 퍼져있다. 거대한 생명 활동의 축제다.
 생명들의 순은 참으로 은근하고 아름답다. 겨우내 죽어있는 것 같았던 검고 메마른 가지에서 드디어 땅의 물기를 올려 솟아난 한없이 고아한 여린 녹색 순색을 본다. 순과 꽃은 바람과 햇살 앞에서 그의 생영을 통해 온갖 색조와 순진함과 아름다움을 피워낸다.
 자연은 모두 그들의 생영을 본연의 처연한 외양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인간은 피창조자의 순과 꽃이다. 그들은 하나님처럼 생영과 슬기를 가졌다. 하나님과 가장 비슷한 존재이다. 순과 꽃들이 자신의 온몸으로 생영을 통해 그의 아름다움을 피워내듯이 인간에게 온몸의 생영을 통해 토해내는 순과 꽃 같은 영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영적 존재인지를 잊고 배설행위의 습관 때문에 말을 함부로 내뱉듯이 동물의 본능에 산다. 영을 가진 자의 가장 지고한 송축 행위는 찬양하는 것이다. 찬양할 때 순과 꽃처럼 그렇게 순연하게 그의 영이 오래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피어나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그들의 생영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창조자의 입김이 일어나는 것처럼 영이 발현하여 동조를 일으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동조가 찬양하는 현장에서 무슨 해괴한 이야기인가 마치 비약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찬양 현장에서 평생 살아온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우리의 찬양능력과 처지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이 놀라운 동조현상들을 수없이 만났다.
 이런 경험에 의하면 찬양자의 전제조건은 그들의 영을 하나님이 혼돈과 어둠 앞에서 그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한 것처럼 찬양하는 자의 마음밭에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능력자이신 하나님은 충만해지셔 계시지만 인간은 그 충만을 받는 존재이다. 찬양은 그 충만이 창조자로부터 오시도록 순연하게 자신의 전 존재의 문을 열고 무릎 꿇리는 행위이다.

이선종 목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BA)
Hope International University. Master Christian Music(MCM)
Korea Presbyterian College of America(MDiv)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America(Thm) 수료
Cantor, Music Pastor
카리타스합창단 음악감독
VKCC 지휘자
성서 번역가

_이메일 : Lk4241@gmail.com
_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sunjong.lee.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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