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호]성가(찬양)대는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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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5장

그 후에 저는 유다의 역사를 기술하는 역대하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본래 그들 역사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을 서술함으로써 70년의 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인 것입니다.

그 첫 이야기를 역대하 5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감독한 성전 건물의 완성을 회고한 내용입니다. 화려하고 귀한 건축 재료가 사용되었고, 다윗의 성막에서 가져온 가구들을 들여놓고 십계명 돌판을 담은 언약궤가 북쪽의 시온산에서 옮겨졌습니다. 사람들이 – 성경은 명백하게 밝히지 않지만, 남자들로 생각됨 – 수많은 희생제물을 이끌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제사장들에 의해서 지성소로 옮겨졌습니다. 그다음의 내용이 11절에서 14절까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반차대로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정결케 하고 성소에 있다가 나오매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단 동편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일백이십인이 함께 서 있다가…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정말 대단한 시나리오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 건축을, 7년이라는 오랜 기간과 180,000명의 일꾼들을 동원하여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 완성했습니다. 마침내, 모든 것이 달성되었고 하나하나 다 정돈되었습니다. – 언약궤에서 절정을 이루며 – 그리고 사람들이 처음으로 성전에 입장했습니다. 우리는 노래하는 자들이 거기에 몇 명 있었는지 모르고, 그저 “그 모든 자들”(!)이라고만 알 뿐인데, 120명의 나팔수들 – 실상은 오늘날의 트럼펫이나 각적 같은 양의 뿔로 만든 쇼파르(shofar)를 부는 사람들 – 과 함께 찬양하여도 충분히 들릴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트럼펫과 심벌즈와 하프 연주자 그리고 합창대원 사이의 동일한 데시벨(decibel) 수준을 위해서는 4000명의 대원이 요구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많은 노래하는 자들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성전은 꽤 큰 건축물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일어나는 이야기는 찬양대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하심에 관한 저의 생각에 계속해서 영향을 주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였을 그때” 하나님께서 행(acted)하셔서 당신의 “쉐키나”, 넘치는(kabod 혹은 chabod) 영광의 구름을 보내시니 그의 임재하심이 너무 충만하여 아무도 움직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 영광은 이전에 모세의 성막의 지성소를 가득 채우던 구름으로써 언약궤 위에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께서 거기 지성소에 좌정하시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런 장엄한 영적 행사는 오래된 유다의 역사 속에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만든 성전에 들어가시려고 왜 이때를 택하셨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는 지성소 안에 이미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좌정하시기로 약속되어 있는 때는 언제였습니까? 한편으로 상상해 보면, 하나님의 거하실 장소가 준비되어서, 당신의 영광이 도착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혹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의 아름다움에 너무 감동하셔서 행동하셔야 했나? 이런 추측들은 장엄하고 낭만적인 생각이 될지는 몰라도, 제 생각에 그런 상상은 신학적인 검증에는 견디어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일까요?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우리는 그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이 그 진리를 가르치니 우리는 믿어야지요. 또한 전지전능의 신으로서 그분은 홀로 시작과 끝을 아십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역사를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삶 속에 그때를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그 계획의 일부로써 찬양대가 – 그리고 잘 조직된 오케스트라가 –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한목소리”로 함께 합한 바로 그때 그들의 현재 속으로 자신의 영광을 보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우연한 사건이거나 행운의 일치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그분의 속성과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가대를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음악적 재능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하는 찬양대와 오케스트라. 당신께서 몸소 입장하실 극적인 순간에, 회중을 인도하며 찬양의 노래와 연주의 연합된 소리를 내도록 따로 떼어 지정해 놓으시기에 충분한 성가대로 말입니다.

제가 결론을 이끌어 낸다면, 이 성경구절은 하나님의 마음에, 찬양대와 연주자들은 그의 선두 예배자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예배인도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여 주신 존재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의 탐구를 거의 마무리할 수 있겠죠? 제가 “거의”라고 말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된 내용을 충분히 살펴본다면, 앞에서 언급된 찬양대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확실히 얻게 될 것이지만, 다음에 따라오는 성경의 내용의 의미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준비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20장

다시 역대하 20장 14절부터 24절로 갑니다. 거기엔 아주 다른 장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고, 그는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선한”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산당과 우상들을  폐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와 기도와 금식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기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전에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세 나라의 군대가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왕에게 전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가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여러분도 저처럼 그 기도가 마음에 들 것입니다….
백성들이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야하시엘이라는 이름의 한 성가대원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함께 14절의 말씀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저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육하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멸망의 위기를 당한 왕 여호사밧은 최선의 길을 택합니다. 그가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모으고, 개혁을 시작하고, 백성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도록 인도하는 조치들을 취해 온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제 그는 왕으로서 교만하지 않고 정확히 올바른 행동을 취합니다. 그는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거기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통로를 통하여 해답을 주십니다.

야하시엘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시기적절한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감사하며,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들이 심히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다음날 아침, 성경은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나갔다.” 여기에 믿음의 길을 걷는 주제에 관한 완벽한 메시지가 있지만, 지금은 그 주제를 생략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명백한 절망의 상황을 향하여 걸어 나갈 때, 여호사밧은 백성들과 상의하고 유례가 없는 일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즉, 모든 남성 찬양대를 군대 앞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거의 최고의 믿음의 행위가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제일 먼저 공격받을 수밖에 없는 취약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찬양대는 어떻게 행동하여야 할까요?

그들은 노래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노래합니까?

그들은 역대하 5장에서 솔로몬의 성전봉헌예배에 모였던 백성들 가운데로 하나님의 영광을 안내했을 때 불렀던 그 동일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원래, 시편 100편과 106편 그리고 특별히 136편으로부터 나온 이 찬양, “여호와를 찬양하라(역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의 가사는 이와 같은 극적인 순간에 특히 적절해 보입니다. 그 찬양의 가사는 두려움이나 절망의 단어들이 아닙니다. 그 가사는 하나님은 긍극적으로 선하시며, 따라서 정의로우신 분이라는 확신 속에서 나오는 단어들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에서 있었던 일과 꼭 같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마련해 놓으신 계획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언제? 그들이 노래하며 찬양하기 시작할 때!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연의 일치나 혹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고, 처음부터 계속된 하나님의 의도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야하시엘을 통한 그 예언이 전해진 순간부터 침묵의 밤까지,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의 믿음의 행진까지, 어느 시점에서든지 역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찬양대가 인도하는 자신의 백성의 찬양에 응답하시기를 스스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찬양대의 존재의 이유를 찾아 탐구하는 우리가 이 역대하 20장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에게는, 예상치 못했고 다소 위압적인 모델인 영적 전쟁의 선두에 선 전사로서의 찬양대입니다! 나중에 찬양과 기도를 통한 영적 전쟁과 그리고 예배 인도 찬양대의 삶의 역할과 실행에 대하여 토론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전쟁으로의 부름이란 상황은 주로 예술적인 감성을 다룬다고 생각하는 찬양대인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있습니다. 뛰어난 음악가요 작곡가인 다윗 왕이 용맹스러운 전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지나친 요구는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다음과 같이 해결하기로….

그래서, 저는 본래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찬양대는 사람의 아이디어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이디어인가?

저의 대답은 무엇이었죠? 이 시점에서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물론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찬양대는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이 말은 무엇보다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찬양대 해체계획들이 급히 중단되어야 좋을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저는 우리의 조그마한 새 내쉬빌 교회가 예배시간에 정규적으로 참여하는 찬양대를 갖게 될 것이라고 결정하였습니다. 또한 이 찬양대는 제가 인도해 보았고 지금까지 보아온 찬양대와는 다른 찬양대일 것임을 다짐했습니다. 이 찬양대는 얼마나 잘 연주하여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것인가를 추구하는 찬양대는 아닐 것입니다. 대신 이 찬양대는 예배인도자로서 존재할 것입니다. 한 가지 핵심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찬양대 경험을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입니다. 즉 우리 찬양대는 무엇을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가? 그 해답을 안다면, 우리는 성경에 기초를 둔 그 실행 방법을 알아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김영국 목사
김영국 목사님
대광고와 한양대학을 졸업하고 1974년 미국으로 이주 Hope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신학과 음악목회를 전공하였고 척 스윈돌 목사와 그의 음악목사인 하워드 스티븐슨의 영향을 받았으며 27년동안 남가주 오렌지 카운티의 큰빛한인교회서 사역했다. 지금은 음악목회연구원을 통해 그 사역을 더욱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저서로는 ‘성공적인 예배를 위한 음악목회 프로그램’ ‘성공적인 예배를 위한 찬양과 경배’(한국장로교출판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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